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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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원이 되고 싶어

"나는 어릴 적부터 천장이 무서웠다." "왜?" "그냥 막막하잖아. 얼마나 많은 밤이 지나야 이 삶이 끝나게 될지, 자꾸만 아득해질 때면 천장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서 나를 짓눌러버릴 것만 같았거든. 영원히 이 순간이 계속될 것만 같아서 숨도 못 쉴 듯한 공포감이 밀려와. 손가락도 발가락도 움직일 수 없고." "그럴 땐 너 스스로를 점이라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점?" "응. 점과 점이 이어지면 선분이고, 선분 네 개가 만난 게 천장이잖아.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건 이 방에 있는 여섯 개의 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생각해버리는 거지." "잘 생각해 봐. 원래 너무 멀고 너무 큰 걸 생각하면 누구나 다 질리게 돼 있어. 나도 밤하늘을 보면 그래. 이 넓은 우주 속, 저 많은 별들 중의 하나인 우리가 얼..

ordinary; scene 2021.11.19

11월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길어지는 저녁을 의식하게 되면 밤이 도통 저물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 찬바람에 드러난 살갗이 조금 따갑다 느껴지다 보면 내 생일 즈음이 되면 당신 생각이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날이 많아지면 겨울에 왔다는 걸 깨달아 내가 또다시 그 계절에 서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아 찬 공기에는 늘 당신이 있고 나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처럼 허상으로 당신의 냄새를 좇는 그런 계절에 왔다고 깨달아 분명 이 겨울에 또 한 번 도착한 것뿐인데 나는 이 시기가 되면 내가 이 계절에 버려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 당신이 나를 이 계절에 버리고 갔고 다시 주우러 오지 않아서 나는 마음 끝에 동상을 주렁주렁 달고 속절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것 같아 사실은 내가 당신을 이 계절에 버린 걸 텐데 당신이 나를 온종일 ..

seek; let 2021.11.02

가장 따뜻한 존재로서

가장 따뜻한 존재로서. '어떻게'라는 물음을 늘 갖는 것 같다. 어떻게 저리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어떻게 저리 사랑만을 줄까. 어떻게 너희는 그럴 수 있을까. 코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벌써 몇 년 전인지, 나는 사람이라 너희가 쌓아가는 나이를 우리 방식대로 계산하게 돼서 중년이라며 말로는 놀려도 언제나 애기 같기만 해. 사람 나이로 아홉은 정말 애기가 맞잖아. 초등학생이지만 단추 많은 옷은 스스로 꿰기 어려워하는 그런 나이잖아. 애기잖아. 예방적인 검진이 아닌 사실 확인을 위한 검사로 병원을 찾는 일이 많아지는 코미를 보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어쩌면 너무 조금 남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이상해. 애긴데 아픈 곳이 생겼다는 것도, 몸이 조그마해서 아픈 부위에 따라 치명적일 수 있다..

ordinary; scene 2021.10.20

'사랑과 이해는 어째서 한 몸이 아니던가'

내 편이 되어주세요. 비합리적인 것을 기어코 해내고 마는 것. 수고스러움을 부러 피하지 않는 것. 사랑이 뭐라서, 사랑이 뭐라고, 영속적인 질문에 답을 찾지 않는 것. 사실, 애초에 완벽한 답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 동안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인류의 수만큼 사랑이 있다면 그 수십억 개의 대답은 전부 다를 테니까. 그래서 이토록 불안한 걸까. 답이라는 것을 찾지도, 가까이 갈 수도 없는 것이니까, 저 먼 우주 한 곳의 은하처럼 거기에 있다 알고는 있지만 실재를 믿을 수는 없는 것 같이. 사랑이다. 사랑이야. 그것 말고는 가장 가까운 답이 없는데. 이건 사랑이잖아.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답인 것 같다가도 실재를 믿을 수가 없다. 속상하다. 내 사랑..

ordinary; scene 2021.10.12

무사함으로

미리 밝히자면, 이것은 비용을 대신하는 글이라고. 잊었음에 대한 변명의 비용. 누군가는 별 일이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도 할 법한 그런 일인데, 나는 왜 내게 실망하고 속상한지 모를 일이야. 네 생일을, 여느 때처럼 몇 단락의 문자로 길게 축하하던 그 생일을 잊은 것이 나는 좀 의아하고 더불어 서운하네. 너도 아니고 내게 말이지. 겨를이 전혀 없을만큼 일이 바빴다면, 한겨울에 떨어져 우울함으로 정신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면, 관계가 부질없어 손놓고 있었다면, 일 년에 한 번 정도 앓는 열병을 이번 참에 앓았다면, 아무튼, 변명으로 퉁- 쳐질 것들의 가운데에 있었다면 이리 속상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아니었어서 그래. 나는 별 일이 없었거든. 한여름을 벗어나 일하는 매장은 다시 바빠지긴 ..

ordinary; scene 2021.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