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내 마음과 대화하는 스무개의 인터뷰 질문

재이와 시옷 2022. 5. 10. 17:58

1. 당신은 스스로 ‘번아웃’ 상태라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경제활동을 오래도록 해왔으니까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익히 들어왔고 대강 어떤 상태를 일컫는지도 알고는 있는데, 이 질문에 답하기 앞서 사전에서 검색을 해봤어요. 사전적으론, 뭐가 됐든 '지친 상태'를 얘기하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번아웃에 빠졌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같은 맥락의 일을 근 7년 동안 해왔고 제 의지로 입사와 퇴사 모두 결정한 것도 맞지만, 무기력증과 우울감에 빠져 한 결정은 아니었어요. 한 달 전에 퇴사를 하고 약 반년 정도 합법적인 휴식기를 갖게 되었는데 앞으로, 이제는, 뭘,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모르겠다.'라는 대답이 결국엔 '그냥 다 하기 싫다.'의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런 생각이 좋은 태도는 아니잖아요. 조금 더뎌도, 명명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뭐라도 하자라는 다짐으로 캠프 신청을 한 거예요. 번아웃은 아닌데 썩 건강한 태도도 아니니까요. 건강해 지려고요 이제.


2. 현재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를 5개 이상 나열해보세요. (피곤하다, 활기차다, 게으르다, … 등등)
공허하다. 재미없다. 귀찮다. 무료하다. 졸리다. 


3. 당신을 지치게 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더 나아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을 거라는 점. 고생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점. 그 고생을 오롯이 나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점.
일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하다 보면 '사회적 자아의 나' 가 하잖아요. 그래서 관성으로 하게 된다는 것도 제게는 큰 영향이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우리는 그걸 경력이라고도 얘기하니까요. 내가 책임지고 노력해서 지금은 별로인 이 환경과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자긍심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 혼자 책임지고 노력하는데도 나아지지도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게, 더구나 그 모든 것들을 알아주는 이조차 없다는데 무력감을 느꼈어요. 저는 일과 직업에 대한 열망이 없거든요. 자아실현 같은 거창하고 원대한 포부가 있지 않아요. 제게 직업은 돈을 버는 수단이에요. 하는 일과 책임에 비해 적은 페이를 받았지만 그래도 할만했어요. 그랬는데 이 시기가 길어지니까 결국엔 '내가 도대체 왜?'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더라고요. 돈을 더 많이 줬다면 참고 일했을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는 또 안 했을 것 같아요. 결국 스스로 제가 하던 그 일에 끝을 본 것 같아요. 끝까지 왔으니 종영해야죠. 다른 직업으로 뉴 시즌이 되든, 비슷한 직업으로 시즌2가 되든 아무튼 제 안에선 완결이 난 거라고 봐요. 


4. 현재 당신의 삶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무엇인가요?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오래돼서 낡고 부산스러운 집 곳곳의 풍경들이 꼴 보기 싫어요. 


5.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바꿀 수도 있을까요?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바꿀 수 없다면 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
집 곳곳의 풍경들이 꼴 보기 싫어서 요즘은 부분적으로 대청소를 해나가고 있어요. 집을 바꿔버리면 제일 좋을 텐데 그게 안되니까요. 지난주(5월 첫째 주)부터 정리에 필요한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주말 전까지 배송받고 토요일에 동거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 주방 대청소 중이에요. 3주 정도에 걸친 계획을 잡았어요. 동거가족들이 있으면 특히 엄마가 뭘 못 버리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해야 해요. 


6. 꼭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미뤄놓은 일은 무엇인가요?
없어요. 게으름뱅이의 양심이랄까요, '꼭' 해야 하는 일은 멀리 미루지 않아요. 적당히 해야 하는 일을 기한의 마지막까지 미루기는 해도요. 


7. 스스로 가장 실망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작년 5월에 컨셉진에서 스스로에게 매일 한 개씩 질문을 하고 그에 답해서 인터뷰집을 엮는 콘텐츠가 있었는데 그걸 신청해서 두 달 동안 했었거든요. 거기에도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1년이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제 대답은 같아요. 저는 제게 크게 실망하지 않아요.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이에요. 자기 환멸을 오랫동안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그게 실망과는 또 결이 다르니까요. 이미 벌어졌으면 별 수 없잖아요. 미워도 나고 기특해도 나니까. 까도 내가 깐다고 하잖아요. 저는 저를 까지 않아요. 남 탓도 취미가 없어서 그냥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겨요. 진짜 그럴 수 있잖아요. 


8. 반대로 자신이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위 질문과 반대되는 거라서, 저는 자주 제가 자랑스러운데요. 크게 작게 다 기특해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애인에게 선물하려고 반소매 티를 리오더로 구매했는데 그게 한 달이 됐거든요. 드디어 백화점 매장에 입고됐다는 문자를 당일 오전에 받아서 초저녁에 그거 찾고 지금 애인이 근무하는 직장 근처에서 이 질문에 답하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몰래 짠하고 주려고 얘기도 안 했고요. 길치에 뚜벅이라서 오늘 버스와 전철만 두 시간 넘게 오며 가며 탔는데 길도 한 번 안 잃어버렸고 선물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제가 기특하고 자랑스러워요. 


9. 당신을 즐겁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세요. 아주 사소한 것들도 좋아요. (맑은 날씨,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 등…) 당신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5개 이상 적어보세요.
묵혀뒀던 청소와 정리를 끝내고 샤워할 때 신나요.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과 신발, 소품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잘 어울리면 신나요.
토요일 밤에 한주 고생했다고(저 말고 애인이요) 일주일 마무리하면서 머리 깨지게 시원한 맥주 마시는 거 신나고요.
월요일 오후에 노래 들으면서 20분 남짓 역삼역-강남역까지 여기저기 고개 돌려가며 걸어가는 길 좋아해요.
혼자 걷고 차 마시고 코인 노래방 가서 노래도 부르고 허세 부리며 맥북으로 아무 글이나 적고 결국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가 번 돈으로 나를 위해 나의 기쁨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가장 신나요. 

 

10. 최근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요?
저는 엄마를 되게 좋아해요. 엄청 귀여워해요. 일을 그만두니까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엄마의 크고 작은 감정과 표정들을 볼 때 정말 행복해요. 세탁을 잘못해서 줄어든 조거 팬츠를 엄마 입으라고 줬는데 그 바지 입고 오늘 낮에 운동을 다녀왔더라고요. 저는 늦잠을 잔 터라 뒤늦게 그걸 봐서 그 바지 잘 맞냐고 물어보니까 엄마가 '응 잘 맞아 너무 좋아!' 하면서 새초롬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 귀엽더라고요. 그 순간 되게 행복했어요. 


11. 이것만큼은 꼭 지키고 살고 싶다’ 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여러 개가 있더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 이유도 적어주세요.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는 거요. 상황과 사정에 제 신념을 타협하는 게 끔찍이도 싫어요. 저는 착한 사람이 좋아요. 죄짓지 않고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아요. 결국엔 자존심으로 귀결되겠지만 제겐 그게 자긍심이고 자부심이에요. 


12. 그동안 당신의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와 가장 나빴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스무 살 여름부터 다섯 계절이 가장 좋았어요. 2009년부터 아주 나빠져서 희석해가며 지금까지 왔어요. 


13. 일을 할 때 당신을 즐겁게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아직 취업 경험이 없다면, 앞으로 일을 할 때 어떤 부분에서 보람과 만족을 느끼게 될지 상상해보세요. )
착한 사람을 만날 때요. 직업 경험을 통틀어서 서비스직을 가장 오래 했는데, 착한 손님을 만날 때면 그 순간 정말 기분이 좋아요. 오늘 뭐가 잘못됐나 싶을 만큼 엄청 꼬이는 날이 있어요. 일도 사람도 하나같이 다 별로인 날이 있는데 그러다 착한 손님 한 명을 만나면 참 웃기게도 이전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풀어져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그때마다 해요. 비단 서비스직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고 모든 일상에 통틀어지는 진실이라고 봐요. 그래서 그 순간들이 찾아오면 기분 좋아하면서도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흔들린 정신 한 번씩 매무새 정돈하곤 해요. 


14. 반대로 일을 할 때 당신을 힘들게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아직 취업 경험이 없다면, 앞으로 일을 할 때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과 힘듦을 느끼게 될지 상상해보세요. )
감정적인 부분에서 크게 휘청거려요. 일이 많고 바쁘고 몸도 힘들고 '오늘 하루 정말 고되다' 하게 돼도 결국 일이라는 거 자체는 끝나기 마련이란 말이죠. 그런데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진짜 화가 나고 그 부정적인 감정에 에너지가 들다 보니까 일하며 지치는 것보다 배로 빨리 지쳐요. 개인적으론 무례한 사람이 정말 싫어요. 정말 정말 싫어요. 나한테 무슨 배려를 맡겨놓은 듯이 구는 족속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과 만난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심호흡을 크게 해요. 다 지나갔다아아 하면서요. 


15. 당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직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벌이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작은 카페의 주인과 짧은 글을 쓰는 작가나 인터뷰어요. 


16. 지금 당신에게 가장 힘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저의 전체 에너지를 총괄하는 사람은 엄마인데 이 역할은 '정신적 지주'에 가까운 것 같고, 제게 힘이 되는 사람은 연애 7년 차가 된 제 애인이에요. 


17. 만약 누구에게라도 조언 혹은 격려를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나요?
늦지 않았고 할 수 있다고. 글이 좋다. 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이왕이면 그게 직업이 될 수 있게 그 길을 닦아준 이가 해준다면 좋을 것 같아요. 


18. 당신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떠올려보세요.
내 취향의 집, 작아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맥시멀 리스트라 크든 작든 작아질 거거든요.
지금의 애인과 시츄 한 마리요. 


19. 지금의 당신에게 스스로 작은 선물을 한다면 무엇을 주고 싶나요?
안경이요. 난시가 무척 심하고 후천적으로 각막이 뭐가 어떻게 됐다 그랬는데 아무튼 좀 까다로운 시력을 가졌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안경은 선택적으로만 써서 온전히 테부터 렌즈까지 제 마음에 쏙 드는 걸로 안경을 맞춰본 게 반년 전이 처음이었거든요. 이 첫 안경이 뿔테인데 코받침이 없어요. 여름용+멋 부림용으로 코받침 있는 안경이 갖고 싶어요.


20. 마지막으로 지금 당신에게 스스로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이번 주엔 책을 한 권은 읽었으면 좋겠다 찬숙아. 사놓고 안 읽은 책만 한 책장인데 버릴 거 아니면 좀 읽어라.

 

 

 


컨셉진에서 진행하는 여러 캠프들의 커리큘럼을 보던 중에 마침 환급 기준이 명시된 '번아웃 캠프'가 있어서 신청했고 위 스무 개의 질문은 캠프 시작에 처음 받은 과제였다. 나를 포함한 마흔 명 이상의 사람들이 개설된 밴드에 5주 동안 수행한 과제를 기록했는데 이 첫 인터뷰를 등록하고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을 둘러보면서 조금 이상한 감정을 느꼈었다. 스스로에게 가장 실망하는 때가 언제냐는 저 질문에, 나와는 다르게(그것이 당연하겠지만) '늘'이라고 답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 한 글자와 한 줄이 아렸다. 그걸 읽는 그때의 기분과 감상이 내게 오래 남을 거라는 생각을 그때도 했고, 지금 순간에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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