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이해할 수 있는 저녁이 올까

재이와 시옷 2022. 6. 9. 19:28

 

무엇이든 쓰고 싶어서 머릿속 임시 보관함을 열었더니 열망에 비해 황량해서 말들을 골라내기는커녕 머쓱함만 삼켰지 뭐람. 그래도 최근에 예쁜 사진을 찍어서 이것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만을 앞세워 블로그를 띄웠다. 티스토리 사진 업로딩이 너무 구려서 이게 내가 맥북 초보자여서인지 그냥 여기 시스템이 구려서인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네 라고 적던 중에 드디어 사진 한 장이 업로딩 됐다. 이 녀석들 쓴소리를 들어야 말을 듣는 편인가.


 

'그 집은 애들이 참 착해. 즈이 엄마한테 엄청 잘하잖아.'라는 칭찬을 종종 듣곤 한다. 안 그래도 칭찬에 내성이 없는 나는 대상마저 잘못된 것 같은 상급 칭찬에 몸 둘 바 몰라하며 대답한다. '아유 제가 잘하나요, 저희 집은 아들이 잘해요.' 감사합니다 라는 대답이면 될 것을 그러기엔 양심이 찔리는 것인지 늘 저런 식이 된다. 참 웃기지, 그렇다고 내가 진짜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서른으로 열 번이 넘는 계절을 보내면서도 늘 독립을, 분리된 나의 공간을 꿈꾼다. 가계 사정도, 정작 본인의 주머니 사정도 영 퍽퍽해서 내 곁의 애인과의 동거를 앞당기기 전엔 그것이 어려울 거라는 것도 알면서. 그러다가도 이 작은집에 엄마방도, 친오빠방도 없지만 옷과 책장에게 잠식당했을지언정 엄연한 '내 방'만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두면 나는 또 할 말을 잃게 된다. 

 

몇 년 전 엄마는 무릎을 다쳤고 수술을 했다. 일을 평생 하고 있다. 수술을 하며 쉬었던 몇 달을 제외하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엄마부터 지금까지의 엄마는 일을 하고 있다. 안 써야, 덜 써야 낫는 것이 무릎과 허리인데 한 두 달을 쉴 수가 없어서 앓는 소리로 새벽을 열며 그녀가 길어오는 그 월급이 아쉽고 또 아쉬워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히 집에서 쉬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친척 모임에, 친구들 모임에 입고 들고 나갈 옷과 가방을 둘러주는 것이 효도라고 불리기에 민망한 나의 허영의 결과물이다. 못난 엄마의 남편을 탓하고, 결국 우리를 지키고자 했던 엄마의 선택까지 탓하고 난 후엔 칵칵거려도 목 뒤에서 넘어오지 않는 거친 가래 같은 텁텁함이 온 마음을 뒤덮는다. 

 

못해 본 것이 너무 많은 당신을, 그 한 번도 오래전에야 잠시 경험해 본 당신을, 받아 본 다정함이 없어 못나게 질투를 쏟아내는 당신을, 본인이 먹고 싶은 게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 아주 뒤늦게 하나씩 알아가는 당신을, 아직도 나를 아기처럼 보는 당신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자주 눈물 고이는 당신을,
나는 그런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그만큼 또 너무 이해가 안 되기도 해.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상의 티끌만으로도 끔찍해서 아무것도 그려내지 않으려고 해. 나는 그래서 엄마가 엄마를 잃었을 때 너무 아득했어. 내가 주기 싫다고 떼를 써서 지킬 수 있는 상대가 엄마라면 좋을 텐데 그게 적용되지 않는 삶이라는 게 너무 무력했어. 엄마의 피와 뼈와 살로 만들어진 나인데, 그럼 나는 엄마와 다름없지 않을까. 물음표가 뜨는 저녁들이 무수해도 천천히 이해하고 싶어. 그런 저녁이 왔으면 해. 사랑보다 더한 걸 엄마가 내게 주는 것 같은데, 나는 엄마한테 사랑뿐이 주지 못해서 불공평한 것 같아. 다음 생엔 내 자식으로 태어나줘. 내가 엄마가 될게. 그래서 엄마에게 사랑보다 더한 걸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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