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섣달 그믐날

재이와 시옷 2022. 12. 30. 22:34

 

 

 

 

 

맥북을 여니 화면 오른편에 작은 알림이 떴다. '내일이 섣달 그믐날이라고.' 12월 31일 캘린더에 어떤 일정을 기록해둔 게 없는데, 그냥 내일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지 엉뚱한 기색이었다. 
'섣달'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끝 달
'그믐날'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
'섣달 그믐날'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생김이 무척 정직하고 곧은 단어들이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단조로운데 생김이 예쁘다. 곱다.

 

 

 

오늘은 일하는 금요일이고, 내일은 일하는 토요일이다. 모레인 일요일에는 쉰다. 일을 마친 두 사람은 토요일 밤에 만나 월요일 아침까지 빠듯한 사흘을 보내고 다시 토요일 밤을 기약하며 각자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아침 출근길에 선다. 오늘은 30일이고 내일은 31일 섣달 그믐날이고 모레인 일요일은 신정이다. 1월 1일이다. 2023년의.

 

 

매장 수도에 문제가 생겨 본의 아니게 한 시간 가량 마감이 당겨졌다. 원래라면 퇴근 후 집에 갈 생각 말고는 못했을 텐데 그 한 시간이, 사실상 30분인 그 시간이 뭐라고 오늘을 기록할 수 있는 올해는 오늘이 마지막이겠다는 깨달음으로 약수역 카페에 왔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오랜만의 방문이다. 띄엄띄엄이지만 틈틈이 적어 거의 마지막까지 채운 다이어리에 오늘자로 또 몇 줄을 그렇게 한 장을 적고 블로그를 열었다. 무언가 거창하게 "한 해의 OO"이라도 꼽아야 할 것 같은데 뚜렷이 떠오르는 게 없는 것도 맞지만 사실 좀 귀찮다. 이 모든 게 머리 한 구석을 찌르듯 때리는 사건이랄 것 없이 무탈하게 지나간 거 아니겠냐는 반증도 되지 않을까.라고 또 주둥이를 털어도 본다.

 

 

퇴사를 했고 감자를 쌌고 외사랑을 깨달았고 실감했고 절망까지 간 후에 다시 엉금 기어도 올라왔다 바쁘고 피곤한 애인의 눈치를 살폈고 일품진로의 맛을 알았다 일을 다시 시작했고 휴일을 하루 뺏겼지만 매니저일 때보다 거의 백만 원 차이가 나는 급여를 받았고 허망한 건 잠시 돈은 돈대로 다 썼다 내가 하는 일의 어떤 시기와 시점을 눈치채가는 중에 있다 어제 만난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기쁨과 슬픔은 느끼지 못하고 약간의 빡침과 잔잔한 현타만을 느끼는 것 같다는 호방한 해답을 얻었다 애인의 생일을 보냈고 사람들에게 우리 연애를 설명해야 하는 때엔 칠 년째 만나고 있다 얘기할 수 있는 6주년 기념일을 보냈고 내 생일을 보내고 애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성탄절까지 보냈다 12월 25일 성탄절 당일 한낮의 스타벅스에 앉은 우리 둘이라니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 마주한 풍경에 우린 어색해했고 곧 행복해졌다

무사했다.
나를 버텼고 나를 견뎠고 나를 살았다. 또 살았다. 당신과 함께.
그래 그거면 됐지. 

 

 

내일은 섣달 그믐날, 바뀐 숫자로 다른 이야기를 적어야지 모레와 그 다음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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