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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짝사랑의 종말

재이와 시옷 2022. 12. 17. 17:07

 

 

 

마땅한 글감이 없다고 을씨년스럽게 비워두곤 하는 이 공간에 쓸 말이 생겼다고,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오게 된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일까.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낯을 들여다보면 괜찮다고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거다. 되려 불편한 감각이 돋아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짝사랑에 대해서 쓸 거니까. 나의 외사랑을 쓸 거니까. 부모에게 덜 사랑받는 자식이 쓰는 이야기니까.

 

 

 

처음 하는 짝사랑이다.
한 두 달 전일까 인터넷에서 그런 글귀를 봤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외사랑이 존재한다고.'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란, 자식이 닫고 들어 간 방문을 쓸쓸하게 쳐다보는 부모의 처진 어깨와 뒷모습일 수 있겠지만 내가 읽고 느낀 장면은 두 주인공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부모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자식이다. 엄마의 뒷모습을 좇는 나다. 나는 생애 처음 짝사랑을 하고 있다.

 

열 달을 품어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당연하게 여기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방향과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방향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채널이 다르다.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내가 운이 안 좋다고 멋쩍게 넘겨야 할지, 엄마와 같은 애정의 채널을 나누는 사람이 둘 있는데 첫째는 아빠고, 둘째는 오빠다. 우리는 네 가족인데 나만 채널이 다르다. 

 

이 집에서,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느껴왔지만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한 적은 한사코 없었다. 심심치 않게 시간과 장면들에서 불유쾌한 감정이 들썩일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곤 했지만 어떤 성서처럼 여겨지는 그 사회적 명제를 부정한 적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고해를 들은 것처럼 나는 내가 하는 사랑의 정의를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를 생각하고 위하는 만큼, 엄마는 나를 생각하고 위하지 않는다. 갸웃하게 될 적마다 생각했다.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않느냐고.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 아니냐고. 부모가, 엄마가, 모성애라는 건 그런 거지 않냐고. 한데, 
내 사랑의 크기가 더 크다.  

 

코를 때리며 불현듯 솟구치는 울음을 삼켰던 때를, 참지 못하고 뿜어냈던 때를 구구절절 적으려고 보니 몹시 쪽팔려서 모두 지웠다. '저 사람은 나를 덜 사랑해.' 라는 증거를 내가 일일이 열거하는 꼴은 너무 모양이 빠지니까. 

 

나는 하루에도, 일주일에도, 다달이.
이 사실을 계속해서 깨닫는다. 지긋지긋하게도.
엄마가 나를 가장 적게 사랑한다고.

 

이 짝사랑의 종말은 뭘까. 살며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첫 짝사랑이라 나는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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