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precipice,/toss and turn

구월, 제주의 해가 피부에 아직 남아있다

재이와 시옷 2015. 12. 8. 19:07



  9월, 제주도에 다녀왔다. 다녀왔었다. 21일 아침 일곱시 비행기를 타고 가서는 만 사흘을 떠돌다가 23일 밤 아홉시 반 비행기를 타고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사흘을 꼬박 채웠던 여행이었다.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면 제주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려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언제든 단출하게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베짱이의 아주 큰 장점이었으니까. 무척 많은 억새가 보고 싶어 9월과 10월의 어디쯤 떠나는 날을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정작 용눈이오름에 가지 않아 많은 억새는 보지도 못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티켓 사이트를 얼쩡거리던 어떤 날, 새벽 네시쯤이었을까. 미리 계획이라도 세워둔 양 표를 예매했다. 다가온 날에 맞춰 새벽 지하철 첫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임여사에게, 두툼이에게는 비밀로 하였다. 뭐 잘나고 기특한 것이 있어 세상 좋게 여행을 가냐며 쓴소리를 늘어놓으실 것이 뻔히 그려졌기에. 인천에 가 친구집에 며칠 머물다 오겠다고, 아침 제주공항에서 전화로 전했다. 일방적이고 이기적이게. 어김없이.


  면허가 없다. 따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나는 길치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지인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진성 길치' 친구들 말에 따르면 나는 '지도마저 볼 줄 모르는 길멍청이'다. 문자로 옮겨지니 아주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 버스도 잘 갈아타고, 지하철 환승도 잘 한다. 열번 중 두세번? 정도는 지도를 헷갈리게 본다. 그냥 그 정도일 뿐이다. 나는 자기객관화가 제법 분명하다. 나같은 사람이 운전 면허를 취득해 도로에 차를 끌고 나오는 것이 재앙에 버금 갈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데에 한치의 의심이 없다. 안 된다. 나는 운전을 하면 안 돼!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사흘동안 많이 걸었고 여러번의 버스를 탔고 길에서 많은 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내야했다. 일행이 없었고 쫓기는 일정이 아니었기에 마음은 여유로웠다. 첫날과 둘째날에는 날씨가 그렇게 좋더니만 돌아가는 날인 수요일에는 비가 어찌나 하루종일 내리던지. 몸이 지쳐가는 것이 느껴져 택시를 탔다. 공항 근처 만화방에 가 젖은 옷을 말리며 노곤한 몸을 따뜻한 유자차로 데우고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을 1권부터 완결권까지 정독했다. 몇 번째 보는 것인데도 역시 재밌었다. 시간에 맞춰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고 짧은 시간 그루잠에 들었다. 옆자리 중국관광객이 깨워주었다.


  첫날, 길을 잘못 들어 김녕해수욕장에서 월정리 해수욕장까지 두시간 가량을 내내 걸었다. 해가 높았고 아주 뜨거워지는 시간, 열두시에. 해안도로로 들어선 것인지 왼편에 바다를 끼고 마냥 걸었다. 지도 어플이 띄어진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지만 나의 위치는 말그대로 바다 옆 어느 길가에 덩그러니였다. 스쿠터를 타고 가던 젊은 남자가 사투리를 쓰며 내게 길을 물었지만, 내가 길을 알리가 있습니까. 너는 스쿠터라도 있잖아요. 나는 두 다리 뿐이야. 동행이고 나발이고 스쿠터를 뺏고 싶었다. 더워! 뜨거워! 내 살이 타고 있어! 나와! 하고 싶었지만 지성인이니까. 절도는 안되지 암.


  한여름에도 피부가 타지 않았는데 제주도에 머문 사흘동안 내놓고 다닌 팔과 다리, 그리고 브이넥 모양으로 쇄골과 목 언저리 피부가 탔다. 왼 손목엔 네모 알의 시계를, 오른 손목엔 머리끈과 팔찌를, 발목 조금 높게 올라오는 양말을 신었다. 그 모양 그대로 남겨두고 탔다 우스꽝스럽게. 젠장. 거진 석달이 지났으니 지금은 처음과 달리 피부색이 많이 돌아왔지만 아직 자국이 남아있다. 피부를 통해 시간을 볼 수 있다. 그때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이 자국들이 아직 남아있으니, 지금 그 시간의 사진들을 정리한다고 해도 괜찮은거겠지. 































































































































































































오랜만에 dslr을 들고 갔다. 비오는 수요일의 사진은 없다.
펜탁스 k-x를 사용했다. 첫날은 단렌즈를 물려 아웃포커스가 아련하고, 둘째날엔 번들을 썼다.
여행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바다를 좋아하는지 깨닫는다.
보정이 귀찮아 로고는 넣지 않았다. 뭐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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