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시월을 맺으며

재이와 시옷 2022. 10. 31. 20:06

 

 

 

 

다시 내게 다가오는 하루가 될 뿐인데, 날짜와 숫자에 의미를 조금은 두고서 시월을 맺는 글을 몇 자 적고자 한다. 앨범에 든 사진들을 보며 지난 한 달을 가늠하고 몇 장의 사진들로 월간 일기를 기록할까 했는데, 보정되지 않은 날것들이라 내가 생각하는 시월의 내 모습인 사진 한 장으로 단정 지으려 한다. 

 

 

 

/ 2일의 일요일. 공휴일이 두 번 있었다. 개천절과 한글날. 학생 때도 일개미 때도 카레점장 때도 커피매니저일 때도 빨간날을 빨간날로써 소비해 본 경험이 적은 나는 3년 남짓 고정 데이트 요일이 된 우리의 일요일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까만 고심한다. 짧게는 이틀, 월차에는 사흘을 연인과 함께 보내는데 공휴일을 앞두고 강남권 숙소 비용이 뜨악스럽게 뛰어 토요일 밤이 아닌 일요일 한낮의 강남에서 몇 차례 만났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선 연인을 꽉 끌어안고 몇 날 며칠의 그리움을 묻힌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배가 너무 고프다며 스폰티니 피자집으로 이끈다. 배부를 정도는 아니게 조각피자와 레드락 맥주 두 잔을 나눠 마시고(이 정도면 적게 먹은 편) 이제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쇼핑도 하고 커피도 마신다. 오늘 저녁은 압구정에 있는 영동교집의 제주산 흑돼지 냉삼과 화요 세트. 술이 남아 고기를 더 시키고, 마시다 보니 고기가 또 남아 술을 더 시킨다. 밥알무새인 나는 볶음밥도 놓칠 수 없다. 아직까지 커플이 냉삼에 술 마시면서 우리만큼 돈 많이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은 15만 원 남짓이었는데 애인 말로는 18만 원이라고 한다. 돈 낸 사람의 기억이 맞을 테니 18만 원인가 보다.

 

 

/ 9일의 일요일. 가로수길 테일러 커피에서 애인을 기다린다. 나는 지난주에 애인이 사준 나이키 럭비티를 입었고 애인은 작년 가을에 내가 사준 자라 니트를 입었다. 사주고 입은 모습을 이 날 처음 봤다. 내게만 처음 보여준 게 아니라 개시 자체를 이제야 했다고(^^). 5일이 지났으므로 오늘의 저녁은 자연스럽게 하지만 경건하게 돼지갈비다. 공공연한 우리 둘의 규칙이다. 애인이 한 달 열심히 일해서 나의 소울푸드인 돼지갈비를 사주고, 나 역시 한 달 열심히 일해서 애인의 소울푸드인 치킨을 사준다. 위에 이어서 또 얘기하자면, 커플이 돼지갈비와 치킨을 먹으면서 우리만큼 돈 많이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비 오는 가로수길을 조금 걷다가 초저녁부터 돼지갈비에 청하를 마셨고 적당히(또는 제법) 취한 우리는 코노에 가서 듀엣 콘서트를 열었다. 나는 코노에 혼자 갈 때면 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는데 이날도 애인과의 엉망진창 콘서트를 동영상으로 남겨뒀고 일주일 뒤에 그것을 함께 보았다가 둘 다 말을 잃었다. 좀 끔찍한데 그래도 귀여웠다.

 

 

/ 14일의 금요일. 오랜 친구가 올해 둘째를 임신했고 12월 출산 예정이라 그전에 얼굴 봐 두자고 약속해 어렵사리 날짜와 시간을 맞춰 저녁의 서대문역 할리스에서 만났다. 분리불안을 앓고 있는 배집사(소민이 언니)와 우리들 만나는 자리라고 그나마 레깅스가 아닌 조거 팬츠를 입고 온 길샘(먼지 주양육자)과 거리두기가 만들어낸 아이러니한 축복을 가진 강보호자(가은사랑모)님. 나를 포함한 넷. 넷이서 중학교 동창이라는 교집합으로만 정의하면 이십 년 된 친구들이다. 지난여름 이후 계절을 바꿔 만난 우리는 그간의 근황들과 세 보호자들의 자식 이야기, 출산 후 이제 언제 볼 수 있나 와 브레짜를 선물하자는 이야기까지 망라해 나누고 밤의 전철역에서 손 흔들고 인사를 나눴다. 

 

 

/ 15일의 토요일. 송코미(올해 열 살, 장모 치와와, 수유동 거주)와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라면 우리는 어디든 가는 코미빠들이라, 코미 이동이 용이하고 반려동물 입실이 가능한 장위동의 에어비앤비를 약 두 달 전에 예약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규모가 좀 커진 '갑자기 플리(x) 프리(o) 마켓'을 주최하게 되어 각종 의류와 가방 등을 동대문 사입 삼촌에 빙의해 버스를 타고 숙소로 날랐다. 순식간에 패션쇼 백룸이 되어버린 숙소 침실에서 빤쮸 바람으로 다음 착장을 기다리던 나의 친구들. 갈 때는 한 짐이었는데 모두 제 주인들을 찾아 주고 다음날엔 가볍게 백팩만 뚤레뚤레 흔들며 집에 왔다. 
장을 봐오고, 배달 음식을 시키고, 닌텐도위로 레이싱 게임을 하고, 맥주를 화요 토닉을 와인을 막걸리를 알아서들 본인 주종으로 챙겨 마시고, 저스트 댄스를 추고, 전세대출 정보를 나누고, 성인 토크도 하고, 더러운 친구의 핸드폰 케이스 주문까지 마치고, 바뀐 잠자리가 낯설어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는 코미를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이 코미가 잠든 후에 알아서 몇 시간이라도 잠에 드는 우리들. 9시에 일어나 라면을 끓여 어젯밤 남긴 음식들과 함께 먹고 설거지와 분리수거까지 완벽히 끝마친 후에 세수를 했음에도 엉망진창인 얼굴들로 거울 앞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은 후에 헤어졌다. 12월에 보자는 약속을 남기고. 

 

 

/ 22일의 토요일. 근무 인원의 구멍으로 애인은 휴무일에 쉬지 못했다. 소중한 일요일을 한 주 뺏기고 다시 되찾은 소중한 또 하루. 품절이라 먹지 못한 숯불 바비큐는 다음으로 미루고 후라이드 치킨에 우리가 아는 가장 맛있고 시원한 생맥주로 건배를 한다. 일요일 오후까지 늦잠을 자고 가로수길에 가 예매한 영화를 보았다. <블랙 아담>은 보는 동안 '이걸 굳이 제작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지만 애인과 D.C 영화를 오랜만에 봤다는 기록만 나눠가지기로 했다. 지난밤 과음을 한 우리 둘은 본래 저녁 메뉴로 정했던 새우구이를 제치고 감자탕을 먹었다. 라면사리를 추가하고 밥알무새답게 볶음밥까지 먹은 후에 배 터져 죽을 것 같다고 끙끙거리며 늘 혼자 걷던 역삼-강남 대로를 역으로 애인과 함께 걸어 숙소에 갔다. 

 

 

/ 29일의 일요일. 토요일 밤 야식메뉴는 춘이네 닭볶음탕 -> 싸리골 녹두전 -> (확)멕시카나 치킨(정)이 되었다. 애인의 약 25년 전 얘기를 들으며 치킨과 부대찌개와 생맥주를 먹었다. 숙소에 돌아와 잠든 애인 곁에서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비통하고 충격적인 뉴스속보가 송출됐다. 앞으로 사람들은 '1029 이태원'을 잊을 수 없게 되겠지. 
선릉에서 역삼으로 걸어왔다가 택시를 타고 다시 선릉에 가 보쌈과 백합탕으로 저녁을 먹고 다시 역삼으로 돌아왔다. 밤 11시에 배달 분식 김치볶음밥을 먹고 오늘도 나보다 먼저 잠든 애인의 눈썹을 종종 쓰다 듬다가 나 역시 새벽에 잠이 들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달이 바뀌고 나는 반년만에 새로운 곳으로 출근을 한다. 처음이라 낯설 테지만 어떠한 형태로의 야망이 없는 나는 그 또한 무던하게 지나갈 거란 걸 안다. 이 일기를 적고 집에 가면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내일의 짐을 챙겨야지. 몇 년 전엔 익숙했지만 이젠 어색해진 새 조리화를 담고 바스락 거리는 유니폼과 돈을 번다는 정신까지 챙기면 이 하루가 끝날까. 11월엔 조금 다른 글을 적게 될까. 그렇지도 않겠지. 이제 또 나의 계절이니까.
여기서 맺는다. 시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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