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5) 비틀 휘청 차츰

단출해지는 연습

재이와 시옷 2015. 2. 25. 02:26



단출하다 [형용사] 일이나 차림차림이 간편하다.
높은 기대와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대단한 삶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에 나를 이루기까지 어렸을 때부터 체득한 방식과 그것들로 꾸려온 삶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다는 생각이다. 운이 좋은 편이고 인복이 많아 언제나 감사하다고 입에 달지만 실상 그렇게 살가운 사람이 못되기도 할 뿐더러 나는 자기중심적이다. '너는 제멋대로야.' 라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었던 순간에야 알았다. 아, 내가 제멋대로인 사람이구나! 그것은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너무해!'의 까탈이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 나의 생각과 행동을 풀어내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했으니 당연히 운이 좋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내곁에 남아준 지인들은 얼마나 아량 넓은 이들이란 말인가. 그들과 함께 하니 당연히 인복이 좋다 느낄 수 밖에. 
제멋대로 살아와 놓고 그래도 이 삶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는 모양새가 웃기지만, 마음은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단출하고 단순하고 간결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제까지보다 더 제멋대로 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러려니 하려 한다. 더 망가질 것도 없으니까. 가진 것을 추스리며 나를 따를 예정이다. 복잡하지 않게, 단출하게.




구구크러스트를 오랜만에 사 먹으며. 깡깡 언 것을 밥숟가락으로 우악스레 긁어보았는데 순간 그 단면이 참 에쁘다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아주 오래 한 자리를 지켜온 산맥을 항공에서 찍은 것 같아 보였달까. 아님 말고.




애인이 실팔찌를 주었다. 그는 굵은 실로 된 팔찌를 오른손에 하나, 양발에도 실로 된 발찌를 하고 있다. 하나를 뺏으려 하자(왜 뭐 왜) 이러지 말라며 새것을 주었다. 그런데 보름쯤 지났을까. 나는 악세서리를 몸에 채우면 어지간해선 푸르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팔찌가 저 모양이 되어버렸다. 매듭 끝의 실이 다 풀어져버렸다. 애인에게 보여주며 새 팔찌를 달라했는데 보름째 안주고 있다. 아깝니 이 녀석아.




물이 계속 닿는 반베짱이 일을 하다 보니 손이 무척이나 자주 튼다. 그런 것을 또 신경 쓰는 성격이 못되다보니 튼 채로 또 트고 또 트고. 안되겠다 싶어 BOONS에서 세일하는 바세린 작은통을 샀다. 바세린인가 바셀린인가.








아침 조깅 중의 풍경. 엄청 아침까진 아니고 오전 조깅 쯤 되려나. 연말부터 몇달에 걸쳐 마친 술 탓에 살이 와구와구 쪘다. 하하하. 헬스를 다니는 애인과 헬스를 끊을 돈이 없는 난(...) 시간을 정해 각자의 장소에서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애인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나는 우렁차게 동네 내천산책로를 뛰고 걸었다. 승부욕이 강한 둘이라서 이런 일엔 꼭 내기를 거는데 당연히 내가 이겼다. 하하하. 그런데 저 날 이후로 한 번도 조깅을 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내 몸.




번동의 한 아파트 놀이터. 요즘은 놀이터가 참 잘 되어 있더라. 막 미끄럼틀도 고급스럽더라구. 사진에 보이는 신발은 할매와 혜자와 2014 남은 곗돈으로 똑같이 맞춘 나이키 에어 스피드터프. 




애인은 먹보다. 진지하게. 정말 먹보다. 그런데 날씬해. 심지어 지금이 살집이 좀 붙은거라고. 뭐야 장난해.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배고파, 허기져' 그것도 식사가 끝난지 한 시간 아니, 30분도 되지 않아 저리 말한다. 처음엔 무척 놀라웠는데 이젠 같이 배고파하고 있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홍대 키움초밥 커플세트가 양이 낭낭하게 제법 잘 나온다고 해서 '이 정도면 너도 배불리 먹겠지.' 하고 갔는데 식사가 끝나고 나는 부른 배를 두들기며 으아 잘 먹었다 배불러어. 했는데 너는 말했지. '아, 적당하네.' 신이시여. 저 뒤에 심지어 작은 알밥도 나왔다고.




나 완전 패션피플이네. 두툼이는 어렸을 적엔 눈도 커서 또랑하니 제법 귀여웠는데 지금은 왜 그럴까(갸우뚱) 나는 어렸을 때에 비해 예뻐졌다고 생각했는데 유년 사진 몇 장을 본 애인은 '와, 지금이랑 진짜 똑같다.' 라고 말했다.




나이를 더 먹어도 꾸러기 같은 차림을 포기할 수가 없다. 나는 패딩조끼가 좋다. 좋다고!




카페 아니고. 목욕탕도 아니다. 이곳은 명동 주노헤어. 몇 달 전 했던 염색으로 머릿결이 많이 상한채로 기르던 너. 정리를 좀 할까 싶어 함께 미용실에 갔다. 어떻게 잘랐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깨끗한 투블럭이 좋겠다고 답했다. 컷트가 끝나고 샵을 나와 걸으며 너는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응. 깔끔해 예뻐. 너는 마음에 들어?' "네가 좋다면 됐어. 그럼 나도 마음에 들어." 어우 뭐야 정말.




일요일엔 사우나에를 가고 사우나가 끝나면 뚱땡이바나나우유를 먹는다. 




무척 오랜만에 헌혈의 집에 갔다. 몇 차례만 더하면 나는 대한혈액협회에서 주는 상장(?)도 받을 수 있을만큼 횟수가 제법 채워진 편인데 2014년엔 도통 가지 않았다. 그러다 오랜만에 너와 함께 갔다. 예상했던대로 나는 철분수치 미달이었고 언제나 건강한 너는 전혈을 했다. 네가 사은품으로 받아 온 영화교환권으로 <킹스맨>을 처음 예매했었지만 우린 카페에서 미드를 함께 본다며 티켓을 날려먹었지. 




혹자는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애인이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태도에 '함께 술 마시기'가 있다. 적어도 술을 싫어해서는 안된다. 나만큼의 주량을 바라는 것도 아니거니와(엄청 잘 마시는 편도 아니고)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잔을 부딪힐 수 있어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좋다 나는. 그것으로 볼 때 너는 이것마저 합격점이다. 그러니 나를 화나게 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서로 잘 하자 못난아.




생각도 못한 곳에 개가 있으면 너무 반갑다. 너무 좋다. 그러니까 그 생각도 못한 곳이라 함은 술집이라든가 어 또 술집이나 그 술집 말이다. 설날 밤 늦게 만나 '오늘 같은 날 연 술집이 있을까' 하며 미아사거리로 넘어갔는데 아니 웬걸. 간판들이 모두 휘황휘황. 가까이 보이는 스몰비어집에 들어갔는데 저렇게 예쁜 리트리버가 떡하니. 이름은 렉스. 여자를 좋아하고 침을 잘 흘린다. 냉장고 문고리에 목줄이 감겨 있어 넓은 반경으로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길래 일부러 바로 옆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술을 마시다 쓰다 듬고 쓰다 듬고 쓰다 듬고. 우린 이 술집에 자주 오기로 했다.




고기는 언제나 옳지. 오후 늦게 만나 첫끼를 먹게 된 시간이 다섯시 반. 너는 소주를 주문했다. 쓴 첫 잔을 캬아 넘기고 맛 좋은 고기를 한 점씩 먹었다. 너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고기를 먹어 그러하냐 물으니, 고기를 먹어 그러하고 초저녁 술을 먹어 그러하고 이것들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먹어 제일 그러하다고 했다. 뭐야 정말 부끄럽게. 하하하하하.
홍대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보다 늦게 와 앉았는데 우리가 시키는 모든 메뉴들을 흘끔흘끔 보았다. 우리가 시킨 소금구이를 따라 시키고 우리가 시킨 소주와 맥주를 따라 시키고 추가로 주문한 돼지갈비는 따라 시키고 싶은데 이름이 뭔지 도통 몰라 빤히 쳐다만 보는 것 같길래 애인이 나지막이 '돼쥐갈븨' 라고 알려주었다. 땡큐 하더니 바로 주문해서 맛있게 드시더라. 괜한 데서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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