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5) 비틀 휘청 차츰

비겁

재이와 시옷 2015. 4. 24. 19:10

 

포기와 맞붙은 삶이라 비난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만큼 많은 부분을 내려놓았다. 정규직 일개미를 원했던 열정은 어느 순간 동경에 가까워졌고, 먼 곳으로의 떠남 혹은 숨어버리는 것에 대한 열망은 2년 만에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다시 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부족하고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른바, '퉁치며' 살고 있다. 
삶이 퉁쳐지는 것이라니, 내 삶이 대충대충 퉁쳐지고 있다니, 우습다. 재미있고 기괴하다. 

 

 

외출 후 돌아 온 나를 인지하지 못한 엄마 아빠의 대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덤덤하게 들었다. 두 사람은 나를 걱정함과 동시에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구는 막내딸이 못마땅하지만, 당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이 크지 않아 손 내밀지 않고 묵묵히 때로는 무서울 만큼 개인적인 나에게 정직하게 화를 낼 수가 없다고. 가족이라는 가장 따뜻해야 할 울타리에서 나는 이방인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눈알을 빼로롱 굴렸다. 입을 벌리고 나오는 "그냥 나를 포기해줘요."

 

 

익숙한 동작으로 사전에서 '비겁'을 찾아 보았다. 비겁. 비열하고 겁이 많다. 웃음이 났다.
비열한데다 겁까지 많다니. 정말이지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어제의, 나에게, 참 어울리는 말이라서. 비겁하다. 비겁했다. 앞으로도 다름없이 또 비겁해지겠지. 상처 주는 데에 익숙한 삶이라는 냉소로 내게 당당히 부여했던 면죄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꼽지도 못하는 정서적 결함 덩어리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타인의 마음을 할퀴며 살고 있는지.

 

 

'진심'을 묻는 것은 비겁하다.
나의 것을 숨기고 너의 것만을 묻는 것은 비겁하다.
나는 너에게 보여 줄 진심이 없다는 말은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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