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5) 비틀 휘청 차츰

고통의 역사

재이와 시옷 2015. 12. 17. 21:32

 

최근 읽은 책 한 권이 있다. 책을 사들이는 일에는 끊임없이 부지런하여 지금도 첫 장 한 번 펴보지 못한 여러 권의 책들이 책장에서 먼지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지만, 서점의 온라인몰 장바구니는 비워질 줄 모른다. 책을 읽는 것도(책을 고르고 담고 내게 오기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들까지 모두 포함하여) 너무 좋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너무 좋다. 술자리 한 번을 취소하면 못해도 책 세 권은 살 수 있는데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게 참 나는 멋쩍다. 아무튼, 지난달 임여사가 준 문화상품권을 써 구매한 책이 한 권 있다. <당신이라는 안정제>.

 

오랫동안 마음이 아픈 병을 앓은 작가와 그 작가의 정신과 담당의가 함께 쓰는 이야기. 아픔과 병에 관한 이야기. 7년을 서로 만났다고 했다. 만남이라는 단어는 언뜻 수줍어 보이지만, 7년이라는 시간을 아팠다는 말이다. 책의 처음쯤, 저자는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앓게 되었다고. 공황장애가 처음 그렇게 찾아왔다고. 그가 이야기하고 싶던 주제가 마무리되고 그의 책이 출판되었다고 해서 그의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라 했다. 많이 좋아졌다고. 크게 오래 아팠던 지난날에 비한다면, 지금 많이 제법 괜찮아졌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게 다 나은 것은 아니라 했다. 나는 그 고백이 마음에 들었다. 덜 괜찮다고 말하는 게 좋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게 위로가 되었다.

 

 

때아닌 열병, 또는 약으로도 어지간해선 낫지 않는 몸살이라 부르던 것을 열흘 꼬박 앓았던 적이 있었다. 작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최근까지, 여러 번 스스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련의 통증을 겪었다. 그것들은 그랬다. 먹은 것이 많지 않았는데 속이 무언가로 꽉 찬 듯 답답했고 억지로 토를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 온몸을 떨었다. 추웠던 것이 아니었다. 여름에도, 봄에도, 겨울에도 여러 계절에서 겪었다. 숨이 쉽게 쉬어지지 않았다. 실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랐다. 눈물이 무작정 솟구치는데 힘이 제멋대로 분산되어서는 내 손을 들어 눈물도 제대로 닦지 못했다. 눈을 감고 이 오후의 지옥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짧게는 몇 분, 길게는 한 시간까지 그렇게 나를 통과한 몇 번의 지옥이 있었다. 체를 했던 것이라고, 잠을 많이 못 자서 그런 것이라고, 엄마를 닮아 혈압이 조금 낮아 그런 것이라고, 그냥 기분이 조금 안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둘러대고 변명하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그리고, 그의 문장과 나의 역사가 겹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공황장애를 그렇게 처음 만났다고 했다. 

 

지금도, 아직도 확신은 없다. 병원을 찾고 상담을 받고 진단을 받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마음의 병. 정신병. 심리상담을 받아 보려 몇 군데 알아본 적이 있었다. 상담시간 대비 상담비용이 꽤 커서 오래 숙고했다. 당신 없는 당신의 생일을 여러 번 보낸 후 최근에 들어 스스로 내린 개똥 같은 진단은 그랬다. '나는 괜찮다.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게 병은 아니다. 괜찮다 나는.' 돌팔이 같은 진단이지만 스스로는 만족했다. 저 문장 한 줄로 나는 많이 편해졌으니까. 

 

책을 읽고 놀라지 않았다. 조금은 당황했다. 하지만 개똥 같은 진단을 내렸을 때만큼 나는 편해졌다. 고통의 역사가 설명이 되었기 때문에. '이그 바보야, 네가 그랬던 건 네 마음이, 네 정신이 조금 아파서 그랬던 거야. 확진받고 약 처방받고 상담받고 하면 많이 좋아진다고. 다- 나을 때까지 강산이 한 번 변할 수도 있고, 그날이 아주아주 오랜 뒤에 올 수 있다곤 해도 그 정도면 괜찮다고. 괜찮아지는 거라고.' 엎드려 누워 책장을 넘기는 내 등을 쓸어주는 것 같았다. 이 정도 만으로도 나는 오래 위로받을 수 있다.

 

 

 

'⌳ (15) 비틀 휘청 차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日)들의 갈래  (0) 2015.09.14
안고 싶은 마음  (0) 2015.09.14
비겁  (0) 2015.04.24
단출해지는 연습  (0) 2015.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