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보니 '꼬박'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귀엽다. 꼬박.
순간 말이 너무 귀여워 다른 날처럼 사전에 검색해 보니 유의어로 '고스란히'가 걸린다. 얘는 또 이거대로 귀엽고. 꼬박과 고스란히 라니.
시월을 맺으며 적었던 일련의 일상들이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로부터 꼬박 한 달이 지난 것이다. 흘러 다시 더해진 그 한 달의 이야기를 십일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또 적어 기록하려 한다. 내일이면 다시 한 달이 더해 흐르겠지. 그럼 해의 숫자가 바뀌는 날이 또다시 올 테고.
11월은 뭐랄까. 무뎠고 행복했다.
오랜만인 것은 맞지만 처음은 절대 아니었던, 오래 손과 머리에 익은 일을 다시 시작한 11월 1일의 첫 하루. 일하는 사람과 방식이 같거나 흡사해 몇 년 전 카레 점장이던 전생이 자주 떠올랐다. 유독 이상한 고객을 만나면 비가 와서 그렇다며 작은 도리질을 치는 것까지 모두. 그래서 돈을 다시 번다는 감각은 신선했지만 일 자체에 대한 소회는 크게 남다르지 않았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들과 같은 멤버로 일을 하는 것이 조금 새롭달까. 한 달을 모두 채웠고 닷새 뒤엔 새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는다. 수중에 들어오지도 않은 월급인데 계산기 두드리지도 않고 일단 사고픈 것들을 다 사봤다. 호기롭게 애인 선물도 사고.
그래도 돈을 번다는 것은 좋다. 좋은 일이다. 새 옷을 입어보는 애인의 곁에서 마음껏 예쁘다 칭찬하고 결제를 마쳐 그대로 입혀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애인이 좋아하는 치킨을 내가 좋아하는 생맥주를 마음껏 마시며 호방하게 일시불 결제를 때리는 것도, 근무 시작 전 하루를 여는 5,300원짜리 아이스라테를 마시는 것도, 동생 생일선물을 챙겨주고 싶다며 쭈뼛거리는 임여사를 대신해 삼촌 통장에 축하금을 보내는 것도 아무튼간에 모든 순간 나를, 나의 마음씀을 머뭇거리지 않게 하니까. 그래서 돈을 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예년 같지 않게 춥지 않던 날들이었다. 작년도 재작년도 이맘때쯤엔 분명 코트를 꺼내 입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유독 기온이 높았다. 가을이 길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퍽 괴롭지 않았다. 외롭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아, 울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더 무딘 한 달이었다고 느껴진다.
만 5년을 쓴 핸드폰을 바꿨다. 맥북에어를 영혼까지 끌어 모아 109만 원에 샀는데 물리적 크기로 그에 8분의 1만 해당되는 아이폰 14 pro를 150만 원 주고 사면서 과연 이것이 전자기기에 합당한 금액인가 잠시 골몰도 했지만, 5년 전에도 아이폰 10을 그 가격 주고 샀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5년 동안 물가상승률 고려해도 그다지 안 올랐네! 거저네!(아님) 하며 다시 온갖 카드 할인들을 갖다 붙여 아무튼간 최대의 가격 방어를 해 구매했다. 다시 5년을 써야지.
이로써 나는, 아이폰 14 pro를 쓰면서 애플 워치를 차고(비록 구시대 유물과 같은 3시리즈지만) 두툼이가 짬처리한 에어팟 프로를 서브로 두면서 에어팟 맥스로 노래를 들으며 맥북에어로 카페에서 감성질을 하는 진정한 앱등이로 거듭났다. 갑툭튀 에어팟 맥스란, 애인이 2022 생일선물로 사주었기 때문이다. 하하하하핳.
아, 속눈썹 펌 이라는 것을 생애 처음 해봤다. 아주 놀랍고도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안으로 말리고 처지는 속눈썹이라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내 속눈썹이 긴 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시술을 마치고 거울 속의 내 속눈썹은 마치 연장을 한 것처럼 길따랗고 선명했다. 너무나 놀란 것. 눈을 덜 찌르는 데다 한 2년 전부터 왼쪽에만 쌍꺼풀이 더해져 좌우대칭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속눈썹 펌 이후 오른쪽 눈매가 선명해지며 대칭이 얼추 맞아졌다. 이게 웬 개이득. 속눈썹이 상하는 것도 아니라고 해서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할 생각이다.
오랜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뭉쳐진 일상을 말로 나눴다. 언제고 나의 오랜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하철에 오르는 이를 배웅했다. 헤어지기 전 내밀어진 작은 쇼핑백에 얼마 만에 받아보는지 모르겠는 생일선물이라고 너무 놀라 두 눈 동그랗게 떴다. 벌어진 쇼핑백 안으로 작은 카드가 보이길래 세상에 카드까지 썼냐며 입이 떡 벌어지려는 찰나, 핸드크림 향 설명서라고 말해주어 짜게 잘 식었다. ㅋㅋㅋㅋㅋㅋㅋ 고마워.
오래 살면 계속 챙겨줄 수 있다고, 프리마켓 때 받은 가방 지호씨 기저귀 가방으로 잘 쓰고 있어서 고마워서 그런다며 따로 기프트카드 보내준 수유동 미랑이와, 책 열어 읽는 순간 내 생각이 났다며 같은 책 선물로 보내준 진해의 뽈과, 이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나의 고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맙게도 연락해 축하를 전한 수박이까지. 등등의 모든 마음들과 모든 말들과 모든 축하들이 그저 들뜨고 좋았다.
명품 선물은 더 받고 싶지 않다는 나의 응축된 고백에 토라진 애인은 네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코트며 가방 등은 네가 알아서 사서 들고 입으라고. 본인은 다른 거 사줄 건데 필요하고 잘 쓸 거 같은 걸 생각해보니 그 애플 헤드폰이 적합해 보인다고 내게 괜찮으냐 물으셨다. 암요 저는 당연히 괜찮죠? 그러해서 KW160408CS 각인을 마친 맥스를 함께 가로수길 매장에 가서 찾아왔다. 손가락 접어가며 셈을 해보니 애인에게 벌써 일곱 해째 생일선물을 받았다. 저 각인된 숫자가 우리 만난 날이니까. 1127 생일 당일에 치킨을 먹으며 불현듯 행복하다 생각했고 느껴지는 그대로 소리 내 말했다. 곧장 뭉클해졌고 시큰해졌다. 나는 내도록 행복했고 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