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seek; let 26

하물며 모든 계절이니까

아무것도 쓸 것이 없다고 두 손 놓고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기를 한다. 무엇이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라는 불안으로 지난 메모들을 뒤적인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으로 두 손을 일단 무작정 움직여본다. 누구에게 강요받은 것도 강제당한 것도 아님에도 혼자 초조해한다. 돈을 받는 것도 직업이 되는 것도 명예가 되는 것도 아님에도. 입김이 생겨나나 후 하고 숨을 내쉬며 곧 겨울인가 겨울이 오는 건가 당신을 당겨 실감하려 한다. 당신은 내게 겨울이고 하물며 모든 계절이니까. 하물며 모든 계절이니까.

seek; let 2023.10.20

눈을 감는 건

사랑의 말을 적고도 싶었고 그리움의 말을 적고도 싶었다. 사랑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리워하는 나날을 몰래 삼키기도 했어서. 또 한 달의 끝을 닫으며 이런 식으로라도 말꼬리를 늘여 놓으면 계속해서 이 가느다란 끈이 이어질 것만 같으니까. 처음 들어본 말 앞에 애꿎은 손톱 끝을 뜯으며 숨소리만 골랐다. 놓쳐야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 잡지 않았다. 그게 그를 위한, 그가 바라는 게 아닐까 했는데. 돌아온 말은, 이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 거냐고. 그런 거였느냐고. 왜 잡지 않느냐는 말. 잡아도 되는 거였을까 바랐던 것이 그것이었을까. 입을 벌리고 숨만 죽이던 그때에 떠오르던 건 다름 아닌 십여 년 전 나의 못난 뒷모습. 말을 떼어볼 걸 입을 열고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구질구질하게 들러붙고 매달려볼 걸 잡아..

seek; let 2023.01.31

계절 옷

대부분을 끄집어 내 바닥에 내려두고, 다시 접고 걸어서 행을 맞추고, 걸쳐 보고 둘러보고 발을 넣다 말고 한 발치에 던져두고, 지난 계절에 분명 아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버려야 할지 애매해져 버린 것들과 눈싸움을 잠시 했다가 결국엔 이기고 결국엔 지고, 내 몸 구겨놓은 것 같은 부피의 봉투 한 봉이 만들어지면 그래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자, 부유하는 먼지들을 줄줄 흐르는 콧물로 가늠하면서, 그렇게 한 계절을 접는다. 어떤 때엔, 때일러서 어떤 때엔, 지난번을 참고했다가 때늦어서 수십 번의 계절을 수백 번의 절기를 지나면서도 도통 딩동댕에 닿지 못하지. 옷을 정리하며 계절을 접고 시간을 개는데 손가락을 접어가며 슬픔을 센다. 가을을 통과해 겨울에 닿고 그 중앙에 놓이는 날, 모자란 손가락에 이젠 셈을 어떻..

seek; let 2022.09.29

듣는 이는 없고

듣는 이는 없고 말하는 이만 남은 흑백 무대에서,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고, 남겨야 한다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에 머리를 감싸고 앓아도 보지만 진정 기록하고 싶은 것이 어떤 목차를 이뤄야 하는지 계속 머뭇거리게 된다. 일기 한쪽을 못난 글씨로 채워가며 알아가는 건, 내게 글감이 되는 것이 턱없이 적다는 사실이다. 내가 쓰는 것들이란 당신이거나, 당신과의 이야기 거나, 지긋지긋한 옛사랑이거나, 자기 환멸과 비슷한 스스로를 향한 애증이거나 하는 이제는 아무렇게나 발에 차이는 흔해 빠진 것들 뿐이다. 그래서 글이 이어지기 쉽지 않고 계속해서 써가는 것은 어렵다. 더는 당신을 쓰지 못하는 날이 오는 걸 수도 있겠다. 타이핑을 하고 나니 놀랍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순간이다. 당신..

seek; let 2022.08.30

추억과도

완전한 이별을 위해선, 감정뿐만이 아니라 그때의 추억과도 이별을 해야 한다는 걸. 당연한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노랫말로 훈계를 들은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럴 수 있다는 말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거의 같은 농도로 뱉는 것에 대해. 타인에게 도통 관심을 쏟지 않기도 하면서 어떤 때엔 이 물렁한 고독이 징그러운 촉감이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는 이 모양새가. 나를 너무 쉽게 불쌍히 여기고 또 너무 쉽게 용서하고 만다. 나를 끌어안아 준 적은 없지만 뒷걸음질 뒤에 그 마지막 한 발짝까지 몰아세우진 않는다. 그 뒤는 절벽이니까. 소중한 것에 대해 의심을 시작하면 결국 다치는 것은 마음일까 사람일까. 의심이 시작된 순간부터 소중한 것에서 탈락되..

seek; let 2022.08.12

hOMe

노래 한 곡에 마음을 붙들려서 열흘도 더 전부터 노래 제목과 같은 제목의 글을 써야겠다 마치 해내야만 하는 일인 양 다짐까지 했다. 노랫말은 내가 당신에게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당신이 내게 바랐던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나는 당신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나의 집이 되어주지 않을까 여겼고, 당신은 내게서 우리에게서 집이 만들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던 걸까. 당신의 깨달음이 나의 안일함보다 재빨라서 지어진 적조차 없던 우리의 집은 그렇게 허물어져 버린 걸까.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 되어줬을까. 무엇이 되어준 적이 있을까. 전화 한 통의 수신자도 되어주지 못한 내가, 당신이 편히 몸을 뉘울 집이 되어줄 수 있었을 리가 없지. 빗물이 새 고여 들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안팎으로 들이쳐도 다리를 접어 몸을 웅..

seek; let 2022.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