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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달리고 걷다 보면

재이와 시옷 2022. 10. 8. 18:40

 

 

 

 

 

 

오늘은 10월 8일이다. 코로나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던 갖가지 축제들이 서울 곳곳에서 날 좋은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승부욕이라도 보여주듯 앞다투어 열리고 있다. 오늘은 여의도에서 불꽃축제가 있다. 열흘 전부터 인스타그램에선 숨겨진 불꽃 축제 감상 명소들이 피드에 랜덤으로 뜨고(피드에 이미 떠버리는데 어떻게 숨겨진 명소일 수 있을까) 뉴스에선 혼잡할 여의도 도로 사정과 대중교통 이용의 어려움을 내보낸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을 맨 눈으로 보기 위해 여의도 일대로 낮부터 몰려들고 있다.
평소보다 일찌감치 일어나 긴 샤워와 샐러드로 식사까지 마친 나도 여의도가 아닌 어딘가로의 외출을 아주 잠시간 고민도 했지만, 오늘 서울의 핫플이라고 한 번이라도 호명된 적 있던 모든 곳들은 사람들로 부글부글 끓을 것 같아 1111번을 타고 안암역 근처 치즈케이크가 맛있는 카페에 왔다. 여차하면 50분만 걸어도 집에 갈 수 있는 곳이다.

 

 

오늘의 글은 아주 오랜만에 구질구질하고 음습한 떼쓰기가 아니라, 나를 지나간 대강의 9월의 이야기다. 그럭저럭 지나간 시간들을 기록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아주 반짝거리는 것인데 스스로 자조의 늪에 자주 나자빠지는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미루고 미룬다.

 

 

뻐킹썸머를 읊조리던 8월을 넘기고 9월이 되었을 때, 엄마 아빠 두툼이 나까지 우리 네 가족은 처음으로 다 같이 가족여행이라는 것을 갔다. 명절에 내가 어떻게 도와도 노동력 독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를 올해부터 만큼은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서 뻐킹썸머 때부터 두툼이와 계략을 짰다. 고리타분한 아빠를 한 데 묶어 이동해야 했으니까. 결과적으론 본의 아니게 성공적이었다. 본래는 작은 아빠까지 다섯 명이 가는 여행이었는데 직전 날까지 확정되지 않다가 결국 우리 넷이서 출발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넷이서 단란하게 다녀오라던 작은 아빠의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다. 우리는 강화도로 갔고 20여 년 만에 장사가 아닌 여행 목적으로 그 섬을 다시 찾은 아빠는 어딘가 혼자 벅찬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못난 가장은 말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뒤엉켜 표정에 띄어졌다. 그걸 보는 내 기분은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어. 

 

 

뚜렷하게 드러나는 증상이 없어 귀찮다고 미루던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스스로 진단한 증상들은 자궁근종에 가장 가까웠는데 그래도 다행히(?) 심한 염증과 내막증의 진단을 받았다. 다리를 벌리고 받는 초음파는 이질적이었지만 진료에 불과하니까 별생각은 안 들었는데 작년부터 겪고 있던 미약하지만 꾸준한 복통이 모두 염증과 내막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관계는 조금 언짢았다. 여자 몸은 너무 불편하고 말 그대로 가성비가 떨어진다. 비효율적인 것투성이다. 2주 동안 약을 먹었고 다음 생리가 시작할 땐 내막증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피임약을 먹는다. 처방된 약에 항생제가 있어 금주령을 받았으나 두 번의 주말에 술을 야무지게 먹었다. 구토할 수도 있다는 담당 선생님의 만류가 잠시 떠올랐지만 내 몸은 제법 강인했던 것이다.(이러면 안 됨) 처방약도 다 먹었고 이번 주부터는 복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다음 주엔 재검사를 위해 병원에 가면 된다. 

 

 

꾸준히 달리기를 했다. 주말에 워낙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왕창 먹어대기 때문에 주중엔 나름대로 몸 관리랍시고 먹는 것도 좀 가리고 운동도 한다. 안 그러면 불쾌한 붓기가 연신 이어지기 때문에. 요즘은 이런 억울한 감각들이 첫 번째 노화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내 몸은 나이가 들고 있고 차츰 낡고 있다. 억울하거나 슬픈 건 하나도 없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건강하다는 신념을 가질 수 있었던 서른 살 즈음이 좀 그리울 뿐. 아무것도 안 하면 이젠 몸을 쓰는 게 불편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게 귀찮기만 할 뿐이다. 시월엔 한 번도 달리지 않았다. 다음 주에 달려야지. 아니다 이곳에서 집에 걸어가면 그만이겠다.

 

 

 

 

다 적지 않는 고민들도 있고 다 꺼내지 않는 진심들도 있다. 목구멍 저 아래 담겨 있고 머릿속 한쪽에 고여 있다. 누구도 보여주지 않을 손일기장에도 쓰지 않는 얘기들. 아무튼 그렇게 시월을 지나고 있다. 카페 마감 시간이 다가와 글을 맺어야겠다. 집에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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