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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4) 그렇게 그런 일들

어쩌면 아주 오래된 결핍이었다고

재이와 시옷 2014. 8. 28. 22:10

 

어쩌면 아주 오래된 결핍이었다고.

 

나의 이성조차 바로 보지 못했던 어쩌면 진짜 나의 이야기.
술에 취해서인지 뱉어지는 말들은 여과 없었다.
언제라도 터뜨릴 모양이었던지 비엔나소시지의 꼬리처럼 상처로 점철된 고백들이 입에서 쏟아졌다. 이미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 마음이 예전에 주저앉아버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고. 너무 힘이 든다고."

 

나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 같아서. 그랬던 것만 같아서.
온갖 시간들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온전한 동정이 가슴 아팠지만, 비껴갈 수 없는 오랜 세월의 증거였기에 묵묵히 나를 찢어내고 벌건 상처를 그제서야 내보였다. 새까맣게 탄 가슴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아문 적 없던 어제 난 것만 같은 시뻘건 상처를. 이게 나라고. 이 징그럽고 안타까운 것이 진짜 나라고.

 

가계는 넉넉지 않았고 어린 나는 갖고 싶은 것이 많았다. 꿈만 꾸고 바라기만 했던 많은 밤들이 떠오르는 걸 보면 아마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을 거다. 딸이라는 생물학적 사실로부터 나의 삶은 마이너스로 시작했다. 우스갯소리로 얘기했던 생일이 왜 세 개인지. 나의 출생신고를 잊은 아빠가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잊어도 괜찮은 것이었을까. 나를 뱃속에 품고 때아닌 과일이 먹고 싶다 졸라본 적 없다던 엄마의 쓸쓸함은 또 이대로 어찌나 불쌍한 지. 
할머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보살피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두 해 먼저 태어난 사랑스러운 손자의 여동생쯤이었으니까.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알지 못할, 생이 바뀌어야만 꾸역꾸역 공감이나 할 수 있을까 한 진심의 차별. 눈앞에서 옮겨지던 반찬 담긴 그릇들이 선명하다. 나의 유년의 식사는 모두 그런 식이었으니까.

 

나는 공부를 잘했다. 글씨를 예쁘게 썼다. 체력장에서도 잘 뛰어 운동회 계주를 하고, 수우미양가로 나뉜 성적의 단락에서 단 한 번도 미 이하의 기록을 남긴 적 없던, 속셈학원 한 번 보내달라 한 적 없이 속 썩이지 않는 기특한 둘째 딸이었다. 부반장 선거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그 시절 반장은 어머니회를 솔선수범으로 이끄는 어떤 시간적/경제적 부를 모두 가진 학부모의 자녀의 것이었다. 아빠는 항아리와 목기 등을 팔기 위해 여러 섬들을 떠돌았고 엄마는 가구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시간도, 넉넉한 지갑도 갖고 있지 않은 나의 부모에게 나는 그래도 '우리 딸이 부반장'이라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이것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것'이자 내가 미움받지 않는 방법이라고 알았다. 부반장이 되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애미애비가 집에 없는데도 애가 참 곧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나눗셈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수업이 모두 끝난 뒤 교실에 저녁까지 남았는데 '학원은 왜 안 다니니' 귀찮은 골칫거리를 보는 듯 깔보며 말하던 담임의 말을 혼자 삼켰던 것도. 모두 내겐 방법이었다.
참 슬픈 것은, '예쁨 받는 방법'이 아니라 '더 미움받지 않는 방법'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당신의 예쁨은커녕, 사랑받지 않아도 좋으니 나를 미워하진 말아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나의 당신에는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오빠. 모두가 당신이었다. 나의 첫 번째 울타리 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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