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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4) 그렇게 그런 일들

안녕, 할머니

재이와 시옷 2014. 9. 11. 01:49

 

 

 

 

아빠는 오랫동안 지방과 섬들을 오가며 장사를 하시던 분이었고 엄마는 나와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에서 궂은일을 하다 초등생이 되었을 무렵엔 가구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양육이 온전할 수 없던 때, 나와 오빠는 할머니 손에 컸다. '손에 컸다'는 말이 적확할 만큼 먹고 자고 입고 생활하는 태반을 할머니가 책임져 주었다. 


나는 머리가 굵어지며 아무도 모르게 사춘기를 보내자는 심산으로 마음이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이 집에서 나는 언제나 외톨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로부터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몇 년 전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할머니는 다 알고 있으셨단다. 늦은 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엄마에게 할머니가 말하길 '가시내가 요즘 사춘긴지 뭐시긴지 여간 까탈스럽게 구는 게 아니여. 너도 바쁘더라도 간간이 저것도 신경 쓰고 그래야.' 제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 추후에 깨닫게 되는 모양새가 다 그러하듯 나는 그 말이 참 오래 신경이 쓰였다. 다 알고 계셨다는 그 말의 확증이. 


열네 살. 중학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4월 16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치명적인 질병을 앓으셨던 건 아니지만 당신들의 연세가 겪는 시련을 다름없이 겪으며 신체가 많이 노쇠해지셨다. 병원 입퇴원을 몇 번 오가고 마지막으로 집에 잠시 머무셨던 시기에 다 정리를 마치셨었나 보다. 심장 기능이 많이 약해져 아마도 마지막 입원을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병실에 모든 가족들이 연락을 받고 모였었다. 할머니 임종의 자리,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사실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았고 더 솔직해지자면 할머니의 죽음은 당시 내게 큰 슬픔이지 않았다. 장례는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그간 할머니의 인품을 증명하듯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찾았다. 아빠는 많은 술을 마시기도 했고, 크게 소리치기도 했다. 엉엉 우는 작은아빠는 나무라고 병원 뒤켠으로 나가 홀로 끅끅 우는 모습을 나는 보기도 했다. 할머니의 묘는 고향 김제에 있는 우리 선산에 안치되었다. 할아버지 묘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였다. 그렇게 할머니를 묻었다. 오빠와 나는 더 이상 할머니 손에 크지 않았고 인천집에 단둘이 남겨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우리집에서 쓰이는 네 자리의 번호는 모두 할머니 기일이었다. 웹에서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었을 때에도, 통장 계좌를 개설했을 때에도, 이사해 도어록을 설치했을 때에도 등등 오빠와 나는 그 숫자에 작은 집착을 했다. 이렇게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 죄책과 죄의식이었다. 우리는 할머니 손에 컸지만 오빠는 대개의 손자들이 그렇듯 버릇이 없었고 나는 외사랑이나 다름없는 차별을 몸소 겪으며 할머니에 대한 애정을 차츰 잃어 끝내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못났던 만큼 이것만은 잊지 말자며 네 자리 숫자에 많은 것들을 걸었다. 

 

몇 번의 기일이 지나고 몇 번의 제사가 지났다. 사는게 바쁘다는 진부하지만 가장 솔직한 표현을 핑계 삼아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할머니 산소를 찾지 못했다. 선산 산지기에게 소정의 돈을 보내주어 할머니 묘를 종종 가꾸는 것 외엔 서울과 철원에서 어떻게 더 할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재작년,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추석에 맞춰 할머니 산소를 찾았었다. 나는 당시 회사 파견 근무가 있어 함께 가지 못했다. 사실 일을 하는 게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명절에 저 멀리까지 차를 타고 왕복하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시간의 여기저기에서 나의 돼먹지 못함이 고개를 쳐든다.

 

그저께 월요일에 가족 다 같이 할머니 묘를 찾았다. 엄마 아빠 오빠 나 그리고 작은아빠까지. 사연 많은 가정사인지라 아빠의 형제들은 이보다 더 많지만 이렇게 넷이 온전한 할머니의 가족이다. 나와 작은아빠는 처음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십여 년이 지나 다시 묘를 찾은 게 우리는 처음이었다.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얼마 전 밑 지방에 크게 내린 비에 여기저기 망가진 할머니 묘가 보였다. 엄마는 되는대로 자란 짧은 풀뿌리들을 뽑아내며 울었다. '엄마 이게 뭐야. 미안해 엄마. 묘가 이게 뭐야. 세상에.' 하면서. 아빠는 그런 엄마를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곤 할아버지 묘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 할머니는 그 시대 말로 '첩'이었다. 둘째 부인. 할아버지 호적에 나란하지 못하고 본인 슬하로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평생 깨끗한 호적으로, 처녀로 남아 생을 마쳤다. 그래서 할머니의 묘는 할아버지 묘와 나란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게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느이 할머니 참 불쌍한 양반이라고. 여자로서의 삶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세상에 없던 사람인양 살다가 그렇게 가신 분이라고.'
나와 오빠는 우리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실감이 안 날 뿐이니 할머니 묘 앞에 상을 차리고 여기서 먹자 했지만, 부인은 남편 곁에 와 식사하는 것이라고 할아버지 묘 앞에 아빠가 차례상을 차렸다. 절을 올리고 아빠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할머니 묘로 갔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술이 막걸리었다. 묘의 풀들을 몇가닥 뽑아내며 아빠는 술을 둥글게 따라 부었다. 묘 근처에서 준비해온 아침밥을 먹고 선산을 작게 한바퀴 돈 후에 이제 내려가는 길이었다. 작은아빠와 엄마 오빠가 먼저 내려가고 뒤이어 돗자리와 가스버너를 인 내가 내려가는데, 소주 한병을 다 마신 아빠가 혹여나 풀길에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따라붙는 걸음 소리가 없어 뒤를 돌아보니 저기 아빠가 할머니 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긴 인사를, 긴 말을 하고 있었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우두커니 선 아빠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적고 있다.
아빠는 입꼬리에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소매로 간간이 눈물을 닦아냈다. 아마도 미안하다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명의 자식 중, 할머니 생전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자식 도리를 하고 있는 건 우리 아빠뿐인데도 아빠는 미안하다 하고 있었다. 퍼부었던 비가 자신 탓인 양, 벌레들이 오갔는지 군데군데 난 구멍이 자기가 파놓은 것인 양, 당신의 삶이 측은했던 것이 자신이 속 썩인 아들이어서 그랬던 것인 양, 오래오래 이야기하고 긴 미안함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팠다. 그런 아빠를 지켜보고 있는 나를 들켜선 안될 것 같아 나무 그림자에 잠기게 몇 발자국 더 옮겨 숲으로 몸을 넣었다. 시야에 아빠를 그대로 둔 채 할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예쁘진 않았지만, 손자보다 언제나 못마땅한 손녀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사에 저를 찾으셨던 거면 애정은 크지 않으셨겠냐고.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달라고. 

 

우리 아빠, 우리 엄마. 평생 고생한 이 두 사람 부디 건강하고 앞으로 잘 되게 해 주세요. 아빠는 몇 년동안 건강검진에 금주와 금연이 나오는데도 아직 멀쩡하다며 의사들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니 그냥 조금이나마 술 담배 줄일 수 있게 해주세요. 바깥에서 몸 쓰며 일하시는 분이라 어디 높은 데서 떨어져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저는 마음을 많이 졸여요. 궂은일, 험한 일에는 마음을 보태어 위험을 피해 갈 수 있게 보살펴주세요.
우리 엄마, 아빠 만나 오래 고생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의 삶이잖아요.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엄마 손 잡고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경애야. 네 삶이 꼭 내 삶과 닮았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마음 아프고 그저 고생하는 내 친딸 같다. 너는 마음이 착해서 잘 될거야. 네 생애 분명 크게 좋아질 날 올거니 걱정하지 말아라. 너가 그리 고생하니 못해도 네 자식 생에선 분명 좋아질 거다' 우리 엄마 여생의 복을 빌어주세요. 할머니의 마음처럼 나는 언제나 엄마가 마음 아파요.
할머니가 아껴 마지않던 할머니 손자도 잘 보살펴주세요. 사나운 동생 등쌀에 밀려 기죽고 마냥 순둥이 같다는 내일모레 서른인 이 덩치 큰 손자. 잘 돌봐주세요. 그렇게 마음을 쓰다 조금 정성이 남으면 그때, 욕심내지 않을 테니 그때서야 나를 잠시만 돌아봐주세요. 그것 이상 더 바라지 않을게요. 
아빠와 더불어 긴 인사와 긴 마음을 꺼내었다.

 

다음 봄이 오면, 잔디를 한 무더기 실어와 할머니 묘를 따뜻하게 덮어드릴게요. 주변 무성하게 자란 잡목들을 베어내고 할머니 자리 옆에 작은 꽃나무를 심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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