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적고 있는 지금, 시와의 신보 중 '나의 전부'라는 곡을 듣고 있다. 바람과 담배 연기가 함께 섞인 카페 바깥 자리에서 대단한 일이라도 이루는 사람처럼 노트북을 열고 허세를 부리고 있다. 요 며칠의 모든 글들은 모두 이 곳, 서교동 테일러커피에서 적었다. 오늘은 아이스라떼. 지금 깨어있는 지 열 여덟 시간째라서 정신머리가 온전치 못하다. 눈알이 시큰거리고 두통과 미열이 피어나고 있다. 내 몸이 안좋은 흐름에 있다는 아주 깜찍한 신호. 아주 깨꼬닥 쓰러지기 딱 좋은 컨디션.
전에도 적은바 있지만, 나는 보기로 마음 먹은 영화의 모든 내용을, 갈등의 구조와 순서, 강약, 흐름의 긴장, 하물며 충격적 반전까지 모-오두 들어도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고 영화를 봤을 때, 정말 '나의 이야기가 된 듯한 기분'을 잔뜩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 영화 역시 줄거리부터 아마도 가장 진한 여윤을 남길 엔딩시퀀스까지 절절한 묘사를 모두 들은 후에 보았다. 이야기를 해준 이는 그리 말했었다. '너가 좋아할 영화야. 분명 좋아할거야.'
응, 영화는 좋았다. 분명하게 좋았다.
문화대혁명의 시기, 루는 도망자 신세다. 가족 곁에 머물렀던 시기가 너무 짧았다. 그는 언제나 숨고 숨기는 가려진 삶 속에 있었다. 그의 빛들지 않는 삶에서도 열심히 반짝거려준 그의 가족, 평완위와 딸 단단. 무용실력이 뛰어난 단단은 중요 작품의 주연 자리에 서고 싶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응당 그 자리를 꿰차야 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사라진 아빠의 당을 배신했다는 죄인의 이력이 단단의 발목을 잡는다. 단단의 마음을 홀리는 사람들. 아빠를 밀고하면 네가 원하는 주인공 자리를 주겠노라고. 단단은 루가 기차역에서 도망치기 하루 전 집을 찾아왔을 때 루와 마주했다. 약속시간과 장소를 단단에게 일러주고 평완위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평완위는 이제 남편과 함께 할 앞날을 그리며 두렵지만 부푼 마음을 숨기지 않고 다음날 아침 기차역으로 시간 맞춰 향한다. 하지만 단단의 밀고로 지척에서 루가 잡혀가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이름을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보지만 루는 잡혀갔다. 그리고 몇 년 뒤, 문화대혁명이 종식되며 무죄를 입증 받아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 루. 그는 집으로 오기 전 평완위에게 편지를 부친다. 5일에 돌아가겠노라. 평완위는 편지를 받고 월(月)이 적혀있지 않은 편지의 그 5일을 더듬으며 매월 5일에 기차역으로 루를 마중나간다.
바로 곁에 있는, 마주보고 있는 루를 평완위는 알아보지 못한다. 루가 잡혀가던 것을 지켜보던 날, 그 이후 정신적 충격을 받아 '심인성 기억상실'을 앓게 된다. 루의 대한 대부분의 기억을 잃고 만다.
공리의 완벽한 연기에 먹먹한 가슴을 짙은 호흡으로 쓸어내린다.
그녀가 지나온 세월이 정말이지 곱게 얼굴에 녹아있었다. 불필요함없이 옅고 깊게 패인 주름과 미세한 근육들이 너무도 꼭 맞게 그녀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한 여자의 시간과 감정을 얼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만큼 공리의 연기는 꼭 맞는다. 정말이지 잘 어울린다. 눈 앞에서 끌려가는 남편을 손짓 하나 닿지 못하고 놓쳐야 했을 때도, 기억을 잃어 루를 알아보기는 커녕 다른 이로 착각해 놀라거나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보였던 때도, 루를 편지 읽어주는 친절한 동무 정도로 이해하고 매일 감사의 미소로 그를 맞이할 때의 얼굴도, 5일 아침 단정히 머리를 빗으며 옷 매무새를 다듬고 집을 나서는 그 수줍은 얼굴도.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임에도 남편을 만나러 가는 부인의 수줍음이 주름진 입매에서 풍겼다. 그 작은 감정들까지도 또박또박 전달되었다.
화답없는 사랑을 우리는 얼만큼 견딜 수 있을까.
짝사랑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랑을 루옌스는 '몇 년이 지나고……' 의 한 줄에 담아 보여준다. 정확한 연(年)를 계산할 수 없지만 부쩍 늙은 둘의 얼굴과 굽은 등허리, 세월을 모두 담은 듯 나이든 눈동자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5년, 7년, 아니 10년쯤 되었을까. 평완위는 여전히 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이제 완벽히 편지 읽어주는 좋은 동무의 위치에서 관계를 이어갈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기억상실장애를 앓는 이웃을 돕는 한사람. 나는 이 사실이 놀라웠다. 이 사실이 마음 아팠다.
평완위가 루를 기억하지 못하고 매월 5일에 돌아온다는 남편을 마중나가는 것도 대단한 일임은 맞다. 그녀는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5일.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5일 뿐이니까. 하지만 루는 다르다. 루는 평완위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둘이 떨어져있던 짧지 않은 세월을 제외한 자신의 전체의 삶에서 그녀를 지운 적 없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모멸차게 하지만 냉정하다 비난할 수 없는 결함의 상태로. 나는 온전한데 상대는 나를, 눈앞에 있는 나와 나누었던 사랑까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매일 매일 실감하고 매월 5일이면 보다 확고하게 절망 앞에 선다. 이 고통을 과연 어느 누가 오래 견딜 수 있을까. 이것은 인내와 확신의 기로다. 아울러 사랑이다. 정말이지 망할 정확하게도.
평완위가 느꼈을 고통(이번 달 5일에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보다 루가 느꼈을 매일의 고통(오늘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이 훨씬 큰 것이라 생각되어 나는 그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단했고 경탄스러웠다. 나는 할 수 없을거라는 비겁함에서 자라는 경외심까지.
그의 결심이 아름다웠을 뿐이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마도 루는 계속 편지를 썼을 것이다. 본인이 쓴 편지를 들고 잠겨있지 않은 평완위 집의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며 경쾌한 목소리로 얘기했을 것이다. '남편에게서 새 편지가 왔어요. 제가 이것을 읽어 드릴게요. 저는 편지 읽어주는 동무입니다. 기억하시죠?' 그렇게 평완위 마음 어딘가에서 무사히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루옌스가 되어 몇 년을 자신에게 편지를 부쳤을 것이다. 평완위는 늙고 루 역시 늙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더운 모래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5일에 길을 나서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제는 인력거 뒷자리에 평완위를 태우고 함께 달린다. 기차역에 기차가 도착하고 실려온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온다. 이젠 루 자신도 정말 루를 기다리게 됐는지도 모른다. 평완위가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루옌스를, 루 역시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직접 들고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머리꼭지에 하나 둘 눈을 맞춘다. 평완위가 기억하는 루가 오늘 5일에는 왔을지도 모르니까.
'⌳ precipice, > s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이후드 Boyhood, 2014 (0) | 2014.10.25 |
---|---|
프랭크 Frank, 2014 (0) | 2014.10.25 |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s, 2014 (0) | 2014.10.20 |
거인 Set Me Free, 2014 (0) | 2014.10.19 |
2014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여섯편 (0) | 201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