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것과 나 자체로 이해받는 것.
이상과 현실이라고 쉽게 풀어 이야기 할 수 있으려나. 돔놀 글리슨(리뷰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겨울에 개봉했던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사랑꾼 타임슬리퍼를 연기한 돔놀글리슨의 생김새에 대해 '생강대가리처럼 생겼다'는 한줄평이 잊히질 않아 어디서든 그를 볼 때마다 생강대가리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사람 얼굴에 대해 생강을 묘사하지? 심지어 그게 어울릴 건 또 뭐람!) 극중 존이라는 인물의 심정적 흐름에 맞춰 영화는 이야기를 흘린다. 별 거 없는 출퇴근길에서 마저도 작사와 작곡의 영감을 떠올리는 존은 음악을 사랑한다. 그저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곡을 만드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언젠가는 이 시시한 일상에 반짝 스파크가 터질 것임을 믿는다. 우리들이 보통의 하루들에서 토요일 저녁 로또 1등이 되는 단꿈을 꾸는 것처럼.
그런 그에게 밴드의 멤버가 되어 키보드를 연주하는, 정말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와 기회가 찾아온다. 존은 행복하다. 자신의 미약한 능력은 때로 부끄럽지만, 이상하다 생각되는 밴드 멤버들과 조금씩 친해지는 듯한 설렘과 앨범이 점차 완성되어간다는 그 성취감에 자신이 가진 돈을 생각보다 많이 써가면서까지 그 시간과 소속감에 마음을 붙들린다.
줄거리를 한 단락 더 적었다가 모두 지웠다. 쓰기 귀찮아져서. 흠.
프랭크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 그 병은 아주 오래 되었다. 그가 갖고 있는 음악적 재능은 그의 병을 더 아프게 만들지 않았지만 같은 맥락으로 그것이 병을 다 낫게 만들지도 못했다. 속이고 감추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가면 쓴 프랭크. 영화는 뻔하지만 '치유'의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 이상하고 괴짜 같고 나아가 괴상하기 그지없는 이들은 서로가 이미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었다. 존은 그것을 몰랐다. 엔딩에 다다라, 가면을 벗고 잔뜩 움츠러든채 멤버들 앞에서 노래하는 프랭크를 보았을 때, 그런 프랭크의 노래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우리가 너의 사랑하는 벽이자 다시 우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그들은 꼭 맞는 합주를 시작한다. 그들과 떨어진 자리에서 이것을 바라보며 존은 깨닫는다. 그들은 서로를 오래 전 받아들였고 이해했고 이해했다는 말마저도 굳이 의미없게끔 서로가 서로로서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존이 놓친 것을 드러내며 그를 부끄럽게 만든다.
아주아주 개인적인 것이지만, 며칠 드라마는 물론 오늘의 영화까지 또 친구들과의 대화까지 모두를 아울러 나는 진정으로 와닿는 것이 딱히 없다. 방수코팅지 위에서 물방울이 나뒹구는 것처럼 자기연민의 쓰잘 데 없는 코팅 위에서 모든 활자와 음성들이 나뒹군다. 흡수되지 않는다. 당연히 치유되지도 않는다. 가면을 벗고 못난 민낯으로 '나는 모두를 사랑해' 노래 부르던 프랭크가 되기 위해선 내겐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의 힐난에 무성의하게 대꾸했지만 그것이 나의 진심이었다. 나는 애쓰고 있다. 정말이지 오랫동안. 정말 애쓰고 있다. 그게 비록 바로 되지 않고 무척 더딜 뿐이지, 그래 보일 뿐이지. 나는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게끔 정말 애쓰고 있다.
영화는 죄가 없다. 가면으로 가려졌지만 그럼에도 드러나는 패스벤더의 연기는 참 좋다. 그 무표정한 이목구비가 새겨진 가면에 마치 그가 말할 때의 표정이 지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왜인지 모르겠는데 영화 <셰임>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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