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precipice,/see

거인 Set Me Free, 2014

재이와 시옷 2014. 10. 19. 22:40
















개봉 전, 영화 내용과는 별개로 감각적인 포스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포스터 자체에서 뿜어지는 영화의 아우라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나는 공개 된 세 장의 포스터 내 카피에 계속 마음이 쓰였다. 


'절망을 먹고 자라다'
'사는 게 숨이 차요'
'세상이 나한테 어쩜 이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볼 영화 타임테이블을 짜며 눈에 바로 보이던 <거인>을 예매했다. 11시. 제법 오전의 영화였던지라 나의 집중력이 괜찮을까 싶었지만(내게 이 정도면 아침이다.) 이왕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 GV관을 골랐다. 나름 배우 최우식을 볼 수도 있겠구나 기대했지만 동명이인으로 본의 아니게 화제가 된 아담한 김태용 감독만을 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몇 개의 질문(GV 당시 질문들이 정말 별로였다. 질문하는 이들 스스로 본인이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채로 무작정 마이크를 든 것만 같았다.)에 본인의 과거 불안에 대해 덤덤히 이야기 해주었다. <거인>은 김태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다.


영화는 무척 좋았다. 최우식 배우의 첫 장편 주연작이라는 게 놀라울만큼 그의 연기는 무척 자연스럽고 또 훌륭했다. <파수꾼>의 제2의 이제훈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말이 수긍될만큼. 
나는 보는 내내 불편했다. 마음이 정말이지 불편했다. 스크린에 눈을 박고 가누기 벅찬 마음을 속의 손으로 쓰다듬느라 애를 먹었다. <거인>에 대해 긴 글을 적게 되지 않을까 미리 말을 꺼냈던 것은 이 영화가 나를 비롯해 극 안의 영재와 같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판단해서이다. 영화를 본 후에 다이어리 끝편에 있는 프리노트 칸을 펼쳐 가지뻗기를 해보았다. 오랜만에 하는 낙서였다. 정리하고 싶었다. 왜 이 영화가 불편했는지 그럼에도 왜 좋다고 입소문을 내고 싶은지.


<거인>의 영재는 '나'였다. 마냥 수수하거나 티없이 아름답지 않은 '나'다. 못난 때가 덕지덕지 붙은 '나'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흉터를 들킨 듯 작게 열어 보이는 게 아니라 끝에서 끝으로 잔뜩 펼쳐 '자, 여기 못난 너를 보렴.' 하는 기분이었다. 감출 마음은 없었지만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나니 이것이 나의 창피한 학창시절이었던 건 아닐까 회의마저 들 지경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아둥바둥 스스로의 책임에 갇혀본 적 있는 이라면 영재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영재는 나이고 우리는 제3자의 눈으로나마, 마음으로나마 그를 감싸주어야 한다. 그를 감싸며 나를 감싸주어야 한다. 그 시절 사랑받지 못했던 나를 안아주어야 한다. 


영재는 영리한 아이다. 그리고 불쌍한 아이다.
일찌감치 가족, 집이라는 궁극의 울타리에서 자신은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집을 나온다. 자신의 발로 시설에 들어가 마음으로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닌 신부가 되겠다며 사람들의 예쁨을 갈구한다. 알고 있는거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적의 생존방법은 미움받지 않고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영재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살아야 하니까.
언제든 비굴해 질 수 있다.
언제든 친구를 배신 할 수 있다.
언제든 가족을 버릴 수 있다.
언제든 내 안의 나를 버릴 수 있다.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해서 영재는 살려 한다.
책임을 모르는 무능한 아버지,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지만 진심이 되지 못하는 엄마, 언제나 마음에 남는 나약한 동생. 장남, 첫째아들, 형. 모든 이름표가 넌더리가 난다. 영재에게는 단 한 가지의 확신만 있으면 되었다. '책임' 내 몸 하나 부빌 곳, 내 마음 하나 쉴 수 있는 곳. 그들이, 그것들의 울타리가 만들어주는 책임 안에 살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이 척락한 세계에서 책임져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비굴과 포기의 삶으로 걸어들어갔을 때의 영재가 느꼈을 공포와 절망을 바로 곁에서 쓰다듬어주지 못해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내 마음을 깨물었다. 영재 곁에 그런 어른이 없었던 것처럼, 나의 시절 나의 곁에 없던 이들을 향한 뒤늦은 원망. 영재의 것과 나의 것이 만나 더 깊은 음울로 빠졌다.  


자신을 살게 해달라고 온 몸으로 부르짖는 유약한 영혼 하나가 거기 있었다. 그저 살게 해달라고. 이제까지 혼자였으니 앞으로 역시 혼자여도 상관없다고. 이미 스스로 짊어진 삶, 그저 이대로 살게만 해달라고.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결국엔 나도 버리게 되었는데 왜 누구도 나를 안아주지 않는지, 내가 이렇게 이 곳에서 땅 속으로 꺼져가듯 작아만 지고 있는데 왜 이런 나를 알아채지도 못하는지. 
원망이 깊어 절망을 아무렇지않게 먹고 희망은 잊은지 오래, 그저 살고만 싶다고. 나로서. 


영재의 신학교 입학을 위해 공부를 가르치던 스무살 선생님 주연의 말이 오래오래 남는다.
도둑질한 신발을 판 돈으로 장갑을 주연에게 선물하며(뇌물이다.) 영재는 부탁한다. 선생님, 내가 괜찮은 아이라고 말해주세요. 영화에서의 대사는 이와 다르지만 해석은 같다. 성적도 오르고 있고 열심히 하고 있고 분명 신학교에 갈 수 있을거라고, 영재는 그런 아이라고, 저를 괜찮은 사람이라 말해주세요. 간곡하고 비굴한 영재의 부탁에 주연은 자리에 가만 서 영재의 눈을 빤히 보며 답한다. 네가 무슨 말 하는 지 알아. 영재야, 나는 네가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말에 스스로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속내가 들통나고 더 시설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영재는 지방의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이마저도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다. 돌아갈 마지막 보금자리는 '집'으로 가까스로 남았지만 영재는 아마 성인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형이랑 함께 살겠다고, 엄마도 아빠도 없이 우리 둘이 같이 살자고 울며 말하는 동생에게 자신의 옷이 든 상자를 건네며 그때서야 열여덟살처럼 웃는다. 처음으로 마음을 내비쳤다. 자신을 책임져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자신이 책임질 수 있고 그래야하는 그 사명이 부담이기보단 다행으로 치환되는 장면이다. 


한 번쯤 속으로 숨는 나를 스스로 알고 있던 이라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는 괜찮지 않냐며 스스로 위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