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히자면, 이것은 비용을 대신하는 글이라고. 잊었음에 대한 변명의 비용.
누군가는 별 일이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도 할 법한 그런 일인데, 나는 왜 내게 실망하고 속상한지 모를 일이야.
네 생일을, 여느 때처럼 몇 단락의 문자로 길게 축하하던 그 생일을 잊은 것이 나는 좀 의아하고 더불어 서운하네. 너도 아니고 내게 말이지.
겨를이 전혀 없을만큼 일이 바빴다면,
한겨울에 떨어져 우울함으로 정신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면,
관계가 부질없어 손놓고 있었다면,
일 년에 한 번 정도 앓는 열병을 이번 참에 앓았다면,
아무튼, 변명으로 퉁- 쳐질 것들의 가운데에 있었다면 이리 속상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아니었어서 그래. 나는 별 일이 없었거든. 한여름을 벗어나 일하는 매장은 다시 바빠지긴 했지만 정신 못 차릴 정도도 아니었고, 설령 그만큼 바빴다한들 이젠 유연하게 그것들을 처리해야 하는 짬이니까? 양껏 우울을 허락받는 한겨울도 아니거니와, 나의 가장 굵은 관계는 이상무. 또 아프지도 않았어. 말 그대로 나는 별 일이 없었어. 그래서 이 말랑한 일상에 네 생일을 축하하는 또 다른 말랑한 일상을 끼워 넣을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어.
생일은 12일이잖아. 13일도 아니고 14일도 아니고 17일 저녁에 일을 하다가 별안간 번뜩 떠올랐어. 그리고 진짜 놀랐어. 재미없는 인간이 돼버려서 놀랄 일도 이젠 잘 없는데 그때는 진짜 놀랐다니까. 육성으로 '허어얼' 하고 눈을 크게 떴어.
나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슬픔을 껴안고 싶어해.
정말 웃기지. 내 슬픔도 온전히 껴안지 못해서 십 년을 넘게 불완전한 인간의 표본으로 살고 있는데 이런 그릇으로 타인의 슬픔을 껴안으려 한다는 게.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된다는 말이 내게는 잘못 흘러 들어와서 나는 나의 슬픔과 다른 이의 슬픔까지 한 데 뭉쳐서 희석하고 싶은 것 같아. 농도가 다른 두 개를 섞으면 층이 나뉘진 않고 흐려질 것 같아서. 그래서 네 슬픔도 안고 싶었고 때가 되면 알람처럼 알려주고 싶었어. 여기에 내 것이 있다고. 어디에든 네게 동화될 감정들이 있으니 힘들어하지 말라고. 힘들어도 되니 너무 앓지는 말라고.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고 그런 역할도 하고 싶던 것 같아.
그랬는데 말이야,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
아무도 주지 않은 역할을 내가 스스로 자청한 어느 날처럼, 네게 기쁨과 안전의 감정이 너의 뜰로 어느날 들어온 것 같아. 나는 나의 슬픔과 너의 슬픔을 합쳐서 양은 불어나도 옅어지면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이젠 네게 온전한 기쁨이 스며서 네 슬픔을 그대로 꿀꺽 달게도 삼켜주는 이가 생긴 것 같아. 아, 나는 그래서 네 무사함을 알았던 것 같아. 그래서 안온하게 너의 생일을 지나간 것 같아.
왜 잊었을까, 축하하고 알려주고 싶었는데 왜 잊었을까. 여러 순간들이 속상했거든. 그래서 답지 않게 '왜' 라는 질문을 내게 했어. 그 질문의 답을 너의 생일 축사로 이곳에 적고 네게 말해줘야지 했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온 나의 답이 이거야. 네가 무사해서.
변명의 비용이 제값으로 지불됐는지 모르겠네.
여름에 들었던 너의 결혼 소식은 까마득한 기분이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부는 구월에 오니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군복 입은 모습 한 번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 내 친구 드레스 입은 모습 먼저 보겠네. 참, 우리 젊은 친구에게 어떻게 식사를 대접해야 할지. 고맙다고, 고생이 많다고, 사람이 좋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다고, 미안하다고 전해줘. 앞으로도 무사할 너로 곁에서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전해줘.
생일 축하해, 은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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