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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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을 다시 더해서

무언가로부터, 어떤 시작으로부터, 백일이라는 시간적 정의가 갖는 의미를 지난 글에 적었었다. 거창한 건 아니었고 그냥 적응하고 조금 익숙해지는 데에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하지 정도의 시간 감각. 그 지점에 백일을 다시 더해서, 유월이 되었다. 3월의 이야기부터 몇 줄을 남긴다. 3월.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 주는 날 태어난 나의 연인의 생일을 맞이하여 둘이서 오랜만에 코에 바람 좀 쐬자며 속초로 일박 여행을 갔다. 강릉을 가장 좋아하지만 여러 번 갔으니 올해부터는 새로운 동해를 함께 가보자 해서 정한 행선지. 강변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약 세 시간을 달려 속초에 도착했다. 바람 쐬러 떠난 건 맞는데 이렇게까지 바람을 쐴 일은 아니었는데(...) 바람이 참 많이 불었다. 저녁부터는 비가 내렸고 ..

아니면 말고 2025.06.02

은거

올해는 비가 잦습니다 서쪽 마을에서 생각보다오래 머물렀습니다 버린 기억을테두리처럼 두른 것이 제가 이곳에서한 일의 전부입니다 끝을 각오하면서도미어짐을 못 견디던 때였고 온전히 가져본 적 없어손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움큼씩쥐고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를 향해다가온다 싶으면 일단 등부터지고 보는 버릇도이즘 시작된 것입니다 은거1. 명사 :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삶

아니면 말고 2025.05.12

무언가로부터 백 일쯤

2년 가까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었던 시간이 약 백일쯤. 다시 일을 시작하고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다' 라는 마인드를 늘 품에 담을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약 백일쯤.(직장이 바뀔 때마다 시기는 계속 당겨지지만) 조그만 갓난쟁이의 백일상을 차리는 걸 보면, 수줍게 우리 백일이라며 기념일을 챙기는 걸 보면, 그래 백일이란 건 여러모로 많은 걸 담는 시간이구나 싶다. 그렇네 한 계절도 백일쯤 되지 않던가. 살면서 몇 번의, 몇 겹의 백일을 보내는구나.늘 그랬듯이 거창한 무엇을 쓰는 건 아니고 오늘은 보다 단순한 기록. 지난주에 텔레그램에서 16년도부터 최근까지 연인과 주고 받은 미디어 기록을, 대부분이 사진인 그 기록을 시간순으로 쭈욱 보고 나니 더 사진으로 남긴 기록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러..

아니면 말고 2025.02.15

스물 다섯과 마흔

그때의 나는 당신에게 무얼 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당신은 아마도 내게 늘 무언가 주고 싶었겠지. 더 주고 싶어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당신이었겠지. 당신이 내가 가진 기억보다 덜 다정하고, 나를 덜 사랑했다면 내가 쥐고 있는 이 미련의 기둥이 조금은 얄팍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받은 사랑을 보고 내가 건넨 것도 꺼내서 그러모았는데 그게 너무 하찮았어서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궁상맞은게 아닐까. 너무 나빴지. 결국엔 다정했던 당신을 탓하고 싶어서 이러는 내가.오늘의 일정이 스케줄에 등록되기 전엔, 올해는 당신에게 때맞춰 다녀올 수 있을까 다녀온다면 좋을 텐데 하며 건방지게 날짜를 꼽아봤었어. 막상 금요일 휴무가 등록된 걸 보고는 '명절 때문에 스케줄 한 번 어지럽네' 이러고..

아니면 말고 2025.01.24

'환한 불행'

소설 보다 : 2024 봄 김채연 작가의 인터뷰 중,    제가 말하는 '환한 불행'이란 오랫동안 볕을 받거나 습기가 배어 본래 그 불행이 어떤 색이었든 좀 더 희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낡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빛바랜 것과는 결이 다른 의미이고요. 어떤 불행을 처음 겪게 될 때 그것을 표현할 마땅한 언어를 곧바로 찾기란 어려울 것이고 그러면 일단 가만히 있겠죠.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요. 이것을 '견딘다'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야, 하고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야 뭐가 뭔지 조금 알게 되는 거예요. 1년이 걸릴 수 도 있는 일이고, 어떤 것은 30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고요. 뭐가 뭔지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앎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비로소 언어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겠죠. 감당해 보겠다..

ordinary; scene 2024.12.16

앞으로 기억 될 십일월은

임시로 저장된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로그인을 했다.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왕 무엇이 남아있어서 스리슬쩍 몇 줄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띄워진 텅 빈 페이지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것도 없네. 그럼 무엇이라도 얼기설기 내가 기워내야 할 텐데 어디 보자 가만 보자 뭐가 좋으려나.    시월을 사흘 남겨두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거의 90일을 쉬었다. 대개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낸 석 달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상처 입었고 지쳤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낮잠을 자고 짧은 저녁잠을 자고 또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고 잠들지 못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꿈을 꾸며 보냈다. 내가 보냈다기보다 그저 사정없이 인정없이 지나갔지. 내게 가장 면밀한..

ordinary; scene 2024.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