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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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불행'

소설 보다 : 2024 봄 김채연 작가의 인터뷰 중,    제가 말하는 '환한 불행'이란 오랫동안 볕을 받거나 습기가 배어 본래 그 불행이 어떤 색이었든 좀 더 희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낡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빛바랜 것과는 결이 다른 의미이고요. 어떤 불행을 처음 겪게 될 때 그것을 표현할 마땅한 언어를 곧바로 찾기란 어려울 것이고 그러면 일단 가만히 있겠죠.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요. 이것을 '견딘다'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야, 하고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야 뭐가 뭔지 조금 알게 되는 거예요. 1년이 걸릴 수 도 있는 일이고, 어떤 것은 30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고요. 뭐가 뭔지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앎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비로소 언어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겠죠. 감당해 보겠다..

ordinary; scene 2024.12.16

앞으로 기억 될 십일월은

임시로 저장된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로그인을 했다.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왕 무엇이 남아있어서 스리슬쩍 몇 줄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띄워진 텅 빈 페이지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것도 없네. 그럼 무엇이라도 얼기설기 내가 기워내야 할 텐데 어디 보자 가만 보자 뭐가 좋으려나.    시월을 사흘 남겨두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거의 90일을 쉬었다. 대개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낸 석 달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상처 입었고 지쳤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낮잠을 자고 짧은 저녁잠을 자고 또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고 잠들지 못하고 어수선하기만 한 꿈을 꾸며 보냈다. 내가 보냈다기보다 그저 사정없이 인정없이 지나갔지. 내게 가장 면밀한..

ordinary; scene 2024.12.02

0110

01 9월 해가 가장 높은 시간 여전히 30도가 넘는데 달을 보여주는 숫자가 8에서 9가 되었다는 그 실감으로 소매가 짧은 면티와 바지들을 정리하려 태를 잡는다. 어서 겨울에 닿고 싶어서, 흰 입김을 보고 싶어서, 당신에게 더 붙고 싶어서.대부분을 끄집어 내 바닥에 내려두고, 다시 접고 걸어서 행을 맞추고, 걸쳐 보고 둘러보고 발을 넣다 말고 한 발치에 던져두고, 지난 계절에 분명 아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버려야 할지 애매해져 버린 것들과 눈싸움을 잠시 했다가 결국엔 이기고 결국엔 지고, 내 몸 구겨놓은 것 같은 부피의 봉투 한 봉이 만들어지면 그래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자, 부유하는 먼지들을 줄줄 흐르는 콧물로 가늠하면서 그렇게 한 계절을 접는다. 어떤 때엔 때 일러서, 어떤 때엔 지난번을 참고했다가 ..

0104와 0033 2024.08.30

1120

11 편견 어 책 읽어요? 어 담배 안 펴요? 호기심이 섞인 갖가지의 질문들은 살면서 모두가 아주 많이 들을 테고 나 역시 수없이 묻기도 한다. 그런데 저 두 질문은, 사실 질문이라고 하기도 뭐 하지. 3할의 호기심과 5할의 무례함 2할의 의아함이 담긴 이것들을 특정 상황들에서 공공연히 듣는다. 그때마다 답을 하며 느낀다. '아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를 통해 갖고 있는 편견에서 기인한 질문들이 이것이구나' 불쾌해하기 보다는 재밌어한다. 내가 어떤 대상에게 편견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섣불리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 모든 걸 포함해 사실 크게 관심이 없다. 편견도 감정 한 톨 이상이 담겨야 발화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편견을 갖기보단 내가 가진 생각과 이성에 대한..

0104와 0033 2024.08.30

2130

21 미래마흔 살 어느 날 저녁, 노을 내리는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그 저녁 이전부터 나의 배우자일 지금 연인의 왼손을 잡고. 그 사람 오른손엔 차박차박 걷는 시츄가 묶인 개줄이 있다. 게으름 피우며 천천히 걷는 시츄를 다독이고 또는 닦달하면서 셋이서 공원을 걷는다. 곧 해가 완전히 지고 이제는 제 발로 걷기 싫다 버티는 시츄를 들쳐 안고 우리 집으로 간다. 개를 집에 내려두고 저녁은 나가서 먹자며 이렇게 저녁을 자주 해결했을 아마도 단골일 동네 작은 호프집으로 간다. 시원한 생맥주 두 잔 시켜 오늘도 고생 많았다고 잔을 부딪히며 건배한다. 나는 오늘 송방에서 어땠는지, 연인은 헬스장에서 별 일은 없었는지 시시콜콜한 말들을 나누며 양념치킨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집으로 돌아오면 연인은 내 신..

0104와 0033 2024.08.30

오 년 그리고 세 번째 그리고 제주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일을 쉬어야지만 심리적으론 그보다 더 여유 있다 느끼는 시간적 사흘의 휴가가 가능하다. 두 사람 다 일을 하고 있대도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지금 우리 두 사람의 환경에선 이 조건이 최선인 것 같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 듯 빠르고 응축해 지나간 사흘이었지만 아쉽다는 마음보단 언제일지 모를 그다음이 그냥 더 기대된다. 그 확신에서 오는 여유 같다. 앞으로도 이 사람과 함께 앞으로의 시간과 생과 삶을 함께 할 거니까.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이번엔 이렇게 지나가도, 다음에 또 그다음에, 우리는 더 더 재밌을 거니까.    2024.08.25 - 08.27

ordinary; scene 2024.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