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전체 글 272

한여름

/ 조언이랍시고 충고랍시고 또는 그냥 하는 말이라며 내뱉을 때는 아무런 자각도 없었던 많은 말들이. 그때의 의중은 내가 하는 말과 생각이 늘 옳다는 가정이었다. 정답이라고 여겼는데 처음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가 틀렸다는 것을 삼켜야 했다. 목에 턱 하고 걸려 넘어가지지 않는 걸 꾹 참고 꾹 삼켰다. 내가 틀렸으니까. 서른을 한참 넘겨 인간관계에서 무언가를 깨우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에라도 깨달아 다행이었다고 스스로 위무했다. /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 부정적인 것들은 최대한 흡수하지 않으려 애쓰곤 하는데, 생활이란 것은 늘 일과 돈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어서 일하며 돋아나는 적갈색의 감정들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크게 하는 요즘이다. 동료가 밉다가도 짠하고 짜증이 나 목소리가 커지고 이래서 내게 남..

ordinary; scene 2023.07.27

'나는 반쯤만 태어났다'

앓는 소리를 내는 것, 아프다 칭얼거릴 수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어느 정도의 치유가 된다. 열이 피어난 얼굴을 쇄골뼈에 기대고 잔뜩 부비면 '많이 아프네. 뜨겁다.' 하며 꽉 끌어안아줌으로 고됐을 나의 하루를 치하해 준다. 그제야 '아, 나 많이 아팠구나.' 종일 쥐고 있어 손끝마저 아릿했던 하루의 긴장을 푼다. 그 순간 모처럼. 그런 한사람을 찾는 여정과도 같지 않을까. 사랑이라 하는 건.

ordinary; scene 2023.06.20

오래 살라고

/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엇일까. / 위기의식이 든 것은 아니지만 평범하고 무탈한 일상이 괜스레 머쓱한 마음에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맥북을 챙겨 나왔다. 오늘의 일을 해내며 저녁이 끝나가는 시점엔 집으로 갈 것인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것인지 잠시간 고민도 했지만 지난주엔 이 고민 뒤에 미련스러운 태세로 무거운 가방을 다시 이고 지고 집으로 갔었기에 오늘은 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약수역에 갈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 안에선 무엇을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 예전에 보니 병맥주도 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마실지 그래도 집에 사놓은 빅웨이브 있는데 바깥에서 9천 원 주고 마시기엔 좀 아깝지 않을까 나는 카페인에 약하니까 디카페인으로 마셔야겠다 살찌니까 주전부리는 먹지 않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

ordinary; scene 2023.04.19

눈을 감는 건

사랑의 말을 적고도 싶었고 그리움의 말을 적고도 싶었다. 사랑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리워하는 나날을 몰래 삼키기도 했어서. 또 한 달의 끝을 닫으며 이런 식으로라도 말꼬리를 늘여 놓으면 계속해서 이 가느다란 끈이 이어질 것만 같으니까. 처음 들어본 말 앞에 애꿎은 손톱 끝을 뜯으며 숨소리만 골랐다. 놓쳐야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아 잡지 않았다. 그게 그를 위한, 그가 바라는 게 아닐까 했는데. 돌아온 말은, 이렇게 쉽게 놓을 수 있는 거냐고. 그런 거였느냐고. 왜 잡지 않느냐는 말. 잡아도 되는 거였을까 바랐던 것이 그것이었을까. 입을 벌리고 숨만 죽이던 그때에 떠오르던 건 다름 아닌 십여 년 전 나의 못난 뒷모습. 말을 떼어볼 걸 입을 열고 바짓가랑이를 붙들어 구질구질하게 들러붙고 매달려볼 걸 잡아..

seek; let 2023.01.31

섣달 그믐날

맥북을 여니 화면 오른편에 작은 알림이 떴다. '내일이 섣달 그믐날이라고.' 12월 31일 캘린더에 어떤 일정을 기록해둔 게 없는데, 그냥 내일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지 엉뚱한 기색이었다. '섣달'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끝 달 '그믐날'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 '섣달 그믐날'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생김이 무척 정직하고 곧은 단어들이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단조로운데 생김이 예쁘다. 곱다. 오늘은 일하는 금요일이고, 내일은 일하는 토요일이다. 모레인 일요일에는 쉰다. 일을 마친 두 사람은 토요일 밤에 만나 월요일 아침까지 빠듯한 사흘을 보내고 다시 토요일 밤을 기약하며 각자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아침 출근길에 선다. 오늘은 30일이고 내일은 31일 섣달 그믐날이고 모레인 일요일은 신정이다. 1월..

ordinary; scene 2022.12.30

짝사랑의 종말

마땅한 글감이 없다고 을씨년스럽게 비워두곤 하는 이 공간에 쓸 말이 생겼다고,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오게 된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일까.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낯을 들여다보면 괜찮다고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거다. 되려 불편한 감각이 돋아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짝사랑에 대해서 쓸 거니까. 나의 외사랑을 쓸 거니까. 부모에게 덜 사랑받는 자식이 쓰는 이야기니까. 처음 하는 짝사랑이다. 한 두 달 전일까 인터넷에서 그런 글귀를 봤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외사랑이 존재한다고.'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란, 자식이 닫고 들어 간 방문을 쓸쓸하게 쳐다보는 부모의 처진 어깨와 뒷모습일 수 있겠지만 내가 읽고 느낀 장면은 두 주인공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부모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ordinary; scene 2022.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