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는데.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도리질을 하며 치워냈던 지질한 그 미련을.
아직 아이임이 명백한 이 미성숙한 짐들을 어떻게 수납해야 하는지 가이드북 없이 스스로 알아가는 데에 걸린 시간이 햇수로 3년. 광활한 그 범위를 모두 숙지하긴 어려워 머리말만 수십 차례 읽고 있다. 읽고 또 읽어보고 주변에서 일러주는 나름의 도움들을 이제는 조금씩 내 메모장에 옮겨 적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겨가고 있는 듯하다.
믿기지 않는, 믿을 수 없는 현실임을 부정하며 지키고자 했던 건, 당신이기도 했지만 나의 기틀이기도 했다. 인정하고 나면 그 후에 걸레처럼 처박힐 병신 같은 행적들을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아 한사코 손사래로 받아쳐냈던 시간. 이제는 조금 알겠더라. 어쩔 수 없었겠지 라는 말만큼 증오스러운 변명도 분명 없었지만, 그 변명만큼 뚜렷한 길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겠더라.
사라졌다고 했다.
말다툼이 이어지다 덜컥 그렇게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현관문을 걸지 않고 잠에 들었다. 니트 한 장 걸치고 홀연히 거리를 헤맬 당신이 걷고 또 걸어 우리 집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로.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일주일 뒤, 지난 일주일의 그날처럼 덜컥 나타난 당신은 깨끗하게 세탁된 니트를 입고 있었다 했다. 다행히 어떤 온기에 안겨있었겠구나 라는 안도로 방만했었지.
갔어야 했다, 고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했다. 내가 그곳에 갔었어야 했고 현관문을 걸지 않고 잠든 것에 안도해서는 안 됐었다. 나는 그날 밤 당신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온 거리를 뛰었어야 했다. 당신을 찾았어야 했고 찾아낸 후 이렇게 입고 다니면 어떡하냐며 큰소리를 내고 당신을 다그쳤어야 했다. 얼은 손을 잡아 녹여주고 얼음 몸과 얼은 마음을 안아줬어야 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빌었어야 했다.
이 죄책으로 지금까지 숱한 나의 밤을 찢어내며 여기까지 왔다. 내 존재가 죄스러웠고 걷고 뛰고 먹고 자고 하는 나의 온갖 일상들이 수치스러웠다. 먹을 수도 잘 수도 없는 생활이 매일같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잠든 줄 알고 이제 찬숙이 어떡하냐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엄마와 통화하던 오빠. 감긴 눈 너머로 내가 아닌 나의 가족들이 무너지는 광경이 아로새겨졌다. 나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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