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봇대에 붙어있던 스티커. 그 스티커를 기억한다.
그 스티커가 홍보하고 있던 업체의 이름이, 곧 우리의 그 자리 이름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를 그 이름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바라보던 꼭대기의 달이 꼭 저렇지 않았었나 하는 오해를 지금 한 번 해본다. 사람들은 이해하는 것이 아닌 오해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문을 답처럼 던지던 작가 박민규의 그 말마따나.
열아홉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해 여름의 당신의 모습은, 귀를 덮지 않게 정돈된 머리칼과 안경이 걸쳐진 매끈한 콧대, 품이 조금 커 보이던 리바이스진과 폴로 피케티. 종종 모자를 들고 있었다. 집에서 요리를 하고 온 날이면 손에서 식초 냄새가 났었다. 그것도 2배 식초. 나갈 준비를 하며 손 씻기를 반복했지만 새큼한 냄새가 쉬이 가시지 않는다며 민망한 듯 그리고 미안하게 웃던 그 가로의 웃음. 오이비누 냄새가 같이 나곤 했다. 당신은 불가리 향수를 쓰고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분명 불가리 향수였고 지금도 매해 여름이 되면 나는 그 냄새를 맡곤 한다. 나를 에워오는 흔적의 공기들에서.
보잘것없는, 재개발이 진행되며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동네를 나란히 걷곤 했다. 문이 열린 집엔 사람이 없었고 깨진 전구가 바닥에 나뒹굴며 빛의 소멸을 말하곤 했다. 길게 이어지지 않는 길들을 몇 분 걷다 털썩 주저앉아 아래로 보이는 동네를 마른 시선으로 보던 그 자리. 미운 말을 했을 것이다. 아랑곳 않고. 나 하나만 생각하자며 못난 입술로 더 못난 말을 어질러 놓았을 거다. 분명히. 대답은 없었을 거다. 당신은 견딜 수 없을 그 말과 자리의 공기들에서 자주 침묵하곤 했으니까.
밝아서 처연한 달이 떠오른 날이면 종종, 그 자리를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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