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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seek; let

03_한 공간 세 개의 이유

재이와 시옷 2013. 2. 17. 16:25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 이보영이 한 대사. 드라마 여주인공이 헤어진 지난 연인에게 바닥 저 밑까지 들켜버렸다는 걸 알아버리곤 제발 곁에 있지 말고 모든 걸 끝내 달라며 뱉은 대사. 쓱하며 빠르게 귓속으로 박혀 들렸다. 문장이 촉각이 되어.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처참함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엄습해 흐르는 눈물조차 냉랭해져 버리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지는 않았을까. 왜 모든 절망의 기억은 겨울에 밀집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낮은 공기의 온도 때문에 그만큼 더 선명한 걸까.

 

 

 

두 무릎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 작아진 몸의 태를 기억한다. 옆에 앉아 있었지만 손을 뻗어 당신의 굽은 허리를 펴줄 수도 없었고, 아니라며 모두 거짓이라고 위선을 부릴 수도 없었다. 마주 볼 수도, 웃어줄 수도, 말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다른 맞은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그 입김에 당황한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 놓고 그저 면목없음을 침묵으로 답했던 그 밤.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내가 아닌 당신의 기분이었을까 봐. 그랬을까 봐. 그랬던 것 같아서.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나는 미안하고, 미안해서 그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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