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precipice;__)/see

지슬, 2012

재이와 시옷 2013. 3. 31. 21:57







퇴근 후 볼 영화의 시간을 확인하고, 퇴근 시간과 상영관까지 가는 거리를 가늠하여 중간의 틈을 어떻게 메울까 살풋 고민하던 때에 지잉- 문자가 울렸다. 카카오톡이 없는 난 몇몇 친구들의 불편의 토로를 들어줘야하는 감내를 치뤄내곤 하는데 그 불편을 제 스스로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냥 문자를 슥삭슥삭 전달해오는 몇몇 친구들의 배려를 기분좋게 느낄 수 있는 여유도 되려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문자의 발신인은 다름 아닌, 지난 주, 약속 당일에 약속을 펑크낸 친구 용히였다. 어라 요녀석보게? 당일 펑크의 이유는 바람이 너무 차다는 것이었다. 완연한 봄에게 밀려나기 싫은 겨울의 떼로 매섭게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써글놈이 당일에 약속을 펑크내다니! 그것도 오랜만에 만나는 녀석 어떤 맛있는 것을 맥여 보내나 맛집을 찾고 길치답게 네이버 약도까지 뽑아놓은 나에게 말이지. 그 고얀놈이 돌연 약속을 잡은거다. 오늘 보았으면 좋겠다고. 써글놈 패기보소? 
'오늘 안돼 약속이 있다능' 이라고 대차게 빠꾸를 놓아줄까도 싶었지만, 또 언제나 보겠나 하는 심정이 반- 별 것 없던 저녁 나절이었던 것이 반의 반- 보려했던 영화를 요놈과 같이 보는 데에 그다지 부대낌은 없겠다 싶던 것이 반의 반. 그리해서 안국역 2번 출구에서 7시 반 친구를 만났다. 씨네코드선재로 걸어가는 길에 짧은 안부를 나누고 보게 될 영화를 역시나 짧게 설명해주었다. 나 역시 큰 이야기를 갖고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지슬>은 아름다운 영화다.
지역적 한계와 그 거리 또는 그냥 관심없음으로 일단락 된 그 무지에게 부끄러움을 남기게 하는 그런 영화다. 그렇지만 그 수치스러움에 몸을 감추기 전,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우선이 되는 그런 영화다. 4.3 항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온갖 민주주의를 둘러싼 사건들에 나름 귀와 지성을 세우려 노력했더랬는데 그 숫자는 실로 어색했다. 낯설었으니 익숙할리가 만무했지. 항쟁이라는 단어 대신 학살이라는 말이 옳은, 그런 사건이었다. 그런 사실이었다.

오멸 감독이 꾸리고자 했던 한 영화는 그의 바람을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 많은 것을 담았지 않았을까 홀로 생각해봤다. 스스로의 것에 모든 만족을 얻는 예술가가 과연 존재키나 할까 싶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조금은 의기양양함을 감독에게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연기와 구름, 혼을 위하는 것, 낮과 밤, 그리고 여자의 선, 공간 안의 환희와 다시 생(生). 씬들은 실로 아름다웠다. 같은 우리민족의 말이지만 자막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반절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 생경함마저 의미가 되는 것 같았다. 불이 없는 동굴 안에 모여앉은 수더분한 마을 사람들의 대화가 원의 흐름으로 돌아간다. 그 장면이 가장 마음에 닿았다.

가난한 삶 배틀이라도 되는 냥, 나의 삶을 헐뜯었던 며칠.
나의 가난을 모욕하고 나의 생을 물어뜯고 나의 가계를 책망하고 결국 다시 나의 밤을 자책했던 그 며칠. 부끄럽게도 삶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흡수하며 그래도 괜찮다고 내 삶을 다독이는 이 꼴이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서.



내가 곧 위로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었으면 그런 인연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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