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였다면, 벌써 새로운 달이 성큼 왔다느니 시간이 참 빠르다느니 하는 팔자좋은 소리들을 붕붕 띄웠을텐데 나름 직장생활 1년차가 되니 한 분기 마감이라는 말이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더라. 찌글찌글한 꼰대같이 제 스스로 느껴져 몸을 베베 꼬면서도 별 수 없이 '매출'과 '목표' 따위 등의 단어 쓰임이 어색하지 않은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거지.
이 날도 그랬다. 차주에 있을 목표성과회의용 분기 결산 자료를 만들어야 했고, 금요일 입점 예정인 신규 거래처에 납품하기로 한 사은품 4,000ea를 우리팀이 손수 포장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해버려 하루종일 정신없이 바쁘던 날이었다.
갑자기 띄워진 네이트온 대화창. 발신인은 쏘였다.
당장 확인하지 못하고 깜빡대는 그것을 작업표시줄 아래에 그대로 둔채 업무를 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팝업해보니 다름 아닌, 금일 저녁 영등포 CGV에서 영화 <전설의 주먹> 시사회권을 쓰지 않겠냐는 이야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야근 확정의 날이었던지라 아쉽지만 안되겠다고 거절을 할까 싶었는데 순간 빡! 하는거다. 아니 무슨 일만 하는 일벌레도 아니고 내가 왜! 싶어서 덥썩 물었다. 어떻게든 영화 시간 전까지 일을 끝내고 말겠노라고. 내게 달라고. 그렇게 공짜영화를 보게 된거다. 영화는 8시 10분 시작이었고, 나는 내일 아침에 마무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정리를 7시 30분에 마치고 빠르게 걸어 영등포 타임스퀘어로 갔다.
에그머니, 아이언맨3 개봉 차 내한한 로버트다우니주니어가 타임스퀘어를 찾은 날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빠른 비트의 음악이 둥둥쿵- 울리는데 흡사 클럽인 줄.
허기진 속을 커피와 와플로 어느정도 채우고 치즈팝콘까지 들고서 상영관에 들어갔다.(맛있게 먹은 팝콘이 치즈였는지 어니언이었는지 헷갈리다가 친구 말을 듣고 치즈 팝콘을 산건데, 내가 먹고싶던 건 어니언 팝콘이었어. 에잇씨.)
사전정보는 거의 없었다.
본 적 없는 웹툰이 원작이라는 것, 황정민과 유준상과 가리온 윤제문 아저씨가 나온다는 것,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피하고 싶은 상대와 해야한다는 것, 그래서 아마도 신파적일 것이라는 것, 강우적 감독 作이라는 것. 정도? (많이 알고 본 것 같네 이렇게 나열하니.)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 언제부터인지 올드하게 느껴진다. 모르고 보았는데 이 영화 러닝타임이 무려 160분 가량이다. 이 중 30분 정도를 걷어냈어도 영화의 흐름 상에 전혀 지장이 없었을 거라는 개인 의견. 주인공의 현재 삶과의 대비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과거와 현재를 주기적으로 오가는데 그 장치는 나쁘지 않았지만 뻔한 전개와 뻔한 새드씬들이 꽤 낯간지러웠다.
영화는 계속 치고박는다. 아무렴 '지상 최대의 파이트쇼' 라는 가제가 붙는 만큼 이는 숙지하고 가는 편이 좋을거다. 나야 종종 쿵닥닥 거리는 액션영화 찾아보는 것도 즐기니 레프트훜이니 라잇트훜이니 하는 그 아찔함들을 꺄하하 웃으며 볼 수 있었지만, 조폭영화 등을 달가워하지 않는 애인을 둔 남자들은 커플이 가서 보는 것을 한 번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의 감상으로 몇 줄 마무리하자면,
1. 영화 <신세계>를 본 관객들이(특히 여성 관객) 배우 황정민에게 빠지는 데에 쐐기를 박는 영화.
2. 유준상 슈트핏이 아주 그냥.
스틸로 넣은 위의 장면이 가장 좋았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던 딸의 상황을 모르고, 그저 성질 더러운 딸이 마냥 좋고 예쁘던 딸바보 아빠에게 뜬금없게 물감 칠갑을 당하고 가게에 찾아온 딸을 보고 놀란 마음, 아린 마음, 안타까운 마음 어쩌지 못하고 어버버 어떡하냐며 부들부들 떨던 '진짜 아빠의 모습'으로 분한 황정민의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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