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이났던 것 같다.
편견을 그득 품고서 책을 두른 띠지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글을 잘 써봐야 얼마나 잘 썼겠어. 불혹의 세월도 넘기지 않은 푸릇한 작가의 글솜씨가 화려해봐야 요란한 빈수레에 그치기밖에 더 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김애란의 글들은 읽어오지 않았다. 글을 잘 쓰고싶다는 허영을 수신으로하는 욕심이 거세질수록 동시대를 살아가는, 더해 같은 성을 가진 작가들의 필력을 아마도 시샘해왔다. 노력없이 얻고자했던 빤한 재주의 열등감에 뒤덮여 진짜와 노력으로 쌓아진 성곽의 단단한 결을 매만져볼 새도 없이 그렇게 마냥 갖고팠었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었고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무진하게 꿈꿨다. 그래서 더 보고싶지 않았다.
평생 버섯전골은 먹지 아니하겠다며 완강하게 식탁 위 올려진 메뉴를 거부해왔다. 음식의 호불호는 어찌할 수 없어 평생을 가져간다 하더라도 문득, 글은 그렇게 가려읽으면 안되지 않을까 싶었다. 직접 구입해 읽지 않는 자기개발 도서 또는 에세이 등의 분류는 별 수 없이 차치하고서라도 찾아읽는 소설/인문학에 범주 안에서의 편독은 옳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거였다. 그래서, 김애란의 처녀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적 인기몰이를 한 이 책을 읽어보자 싶었던 거다.
재미있고, 좋은 글이었다.
열 일곱 소녀과 소녀. '사랑해서' 라는 첨언은 낯이 뜨거운 아직 애달픈 나이. 소년과 소녀는 아이를 갖는다. 그리고 그 시간에서 다시 열 일곱의 해가 지나 소년 소녀의 아이는 자기의 어미와 아비가 자기를 낳았던 나이가 된다. 열 일곱 아들과 서른 네 살 엄마와 아빠. 열 일곱 아들은 제 부모보다 배로, 곱절로 먼저 나이들어 버린다. 소년은 조로증에 걸려있다. 여든 살 노인의 몸을 가진 열 일곱 소년의 아프지 않던 날이 없던 하루와 또 하루. 이 소설은 소년이 보고 듣고 종국엔 온 감각을 세워 느끼는 세상의 이야기다.
열 여덟 번 째 생일을 맞는 것이 온 가족의 염원이 되는 사투의 날들을 보내는 아름이다. 머리가 희어 모두 빠지고 눈썹이 없는 맨숭한 살결은 땀이 맺히기 무섭게 눈가로 그것을 흘려보낸다. 몇 시간 골몰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자면 눈가가 금세 뻐근해져 글자들을 완만히 봐내는 것도 어려워지고 끝내 시신경은 조그라들어 어둠만 자리에 남는다. 신체 나이 여든의 노인의 몸으로 아름이가 느끼며 바라보는 이 세상은 참 경이롭게도 마냥 절망적이지 않다.
수 백, 수 천 권의 책들을 통해 익히고 여행한 세상의 이야기들과 합창하며 소년 아름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그 수더분함이 쪽하니 시려 집으로 오는 전철 안에서 눈물 자리를 조금 찍어내곤 했다. 주책맞을 만큼.
여느 열 일곱 소년과 다른, 다를 수 밖에 없었을 아름의 생을 보며 분명 어딘가에서 물감을 모로 똑같이 찍어낸 듯 이 삶을 사는 이가 있을텐데 하는 가늠이 일었다. 그 삶도 아플텐데 힘겨울텐데 하는 걱정도 함께. 그 걱정의 풍향계가 돌고난 후 이 자리에 나의 터와 내가 갖고있는 어떤 힘에 대해 생각해봤다. 건강하다는 것만으로 삶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신파적 결론. 무릇 이같은 생이 다 고만고만 하겠구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의 길이를 재미로 재어보고 까륵까륵 숨을 담아 웃는 그런 보통이자 놀라운 삶. 고만고만한 삶.
좋은 작가를 알게된 것 같다. 얄량한 온점에 닿는다.
야근을 하고 집에 와, 것도 모자라 업무 연장을 하고 있으니 진이 빠져 그럴싸한 결론을 못 짓겠다. 졸립고 피곤하다. 자야지.
'(precipice;__) > s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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