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precipice,/see

우리 선희, 2013

재이와 시옷 2013. 9. 20. 16:22

 

 

 

 

 

 

 

 

 

 

여름이 점차 그 기세를 꺾어갈 때 쯤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에 대한 정(情)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나, '일' 자체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쯤부터 '일'이란 것이 몹시 하기 싫어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뒤틀어대고 있다. 당장 사직서를 던져두고 뛰쳐나온다 한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컷처럼 간지 포텐이 펑-하고 터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아기새처럼 짹짹거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각종 체납금들을 나몰라라 할 수가 없기에, 뒤틀리는 심산을 모른척 외면하고 그냥 그렇게 아침 6시 40분에 눈을 꿈뻑꿈뻑 뜨는 것이 전부인 이 지지부진한 날들의 연속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와중, 주제도 모르고 긁어버린 유흥비에 카드값이 휘청하여 생각지도 못한 기한에 걸뱅이로 살아야했으니 매일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했던지. 보고싶은 영화는 저어기 극장에 걸려 나를 보러오라 손짓하는데 8천원이 없다. 현금 2천원이 전부에 카드한도가 흡사 빵꾸가 나버린 것이다.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며 도래한 이 사태를 어찌 타파해야할까 고민을 해봤지만 답은 '인센티브' 뿐.

명절 상여금이 사라져버린 가난한 중소기업에 마지막으로 살아 숨이 붙은 인센티브가 화요일 오후, 기적적으로 급여통장에 입금되었다. 응당 받을 것을 받은 것인데 왜 이딴 걸로 감동을 받는거니. 하마터면 애사심에 불타는 직원 코스프레에 빠질 뻔 했다.
이른 공지가 떨어지지않아 비적비적 눈치만 보던 차에 '오늘 근무는 세시까지입니다 임직원 여러분들' 팝업을 보는 순간 바로 영화 시간표를 알아봤다. 몇 번을 가도 그 입구를 한 번 씩은 꼭 헤매는 씨네큐브에 도착해 생각보다 많은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
감상 전 사담이지만, 영화 취향이 맞지 않는 애인과 굳이 그 영화를 봐야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여자는 영화가 지루한 지 내내 핸드폰을 꺼내 네이버 메인 기사를 훑던데, 남자는 그것이 미안한지(우습게도) 연신 어깨를 토닥토닥토닥. 야이씨 위로받을 건 뒷자리에 있는 나야 이 양반아. 엔딩크레딧 올라가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여자의 뒤를 좇으며 '별로였어? 미안해 재밌는건데' 하며 안절부절해 할 거라면 취향으로 그 극장 안을 메운 관객들은 뭐가 된다고. 아무튼 그냥 취향 엇갈리면 따로 보라고. 각자 보고 이따가 만나도 되잖아 어차피. 




다른 누구보다 정재영의 연기를 기대했다. 조금 그래. 기대했다는 말보다는 기다렸던 것 같아. <우리 선희> 포스터에 나란히 걷고 있는 넷을 보면서 유독 정재영에게 집중했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그가 딱봐도 모지리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곤 입술을 대빨 내밀고 걷는 그 그림을 보면서 계속 설렜다. 이 기다림과 기대와 설렘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으니 나는 이것으로도 무척 만족할 수 있다.
술을 마시는 씬에서는 진짜 술을 (많이)마시기도 한다고 인터뷰했던 이선균이 떠올라 문수와 재학이 파고파고 드립을 할 때엔 짠하기도 하면서 꿀렁꿀렁 웃음이 새나와 애를 좀 먹었다. 진짜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아 보였다.

이제까지 홍상수 영화를 볼 때엔 특정 인물과 특정 씬에 강하게 집착했었다. 뚜렷하게 각인되는 한 씬을 중심으로 잡고, 그 안에서 다시 인물을 보고 다시 이야기의 흐름을 짜가며 스스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우리 선희>에서는 달랐다. 모두가 그리고 모든 씬이 눈에 들어왔다. 선희의 의뭉스러운(어쩌면 썅년일지 모를..) 그 태도들과 간절함과 애틋함이 쉼없이 교차되던 문수와 재학과 최교수의 눈빛들, 닭이라면 환장을 하는 아리랑 주인의 그 새된 웃음소리까지. 그냥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것들이 담겨져 새로이 들어왔다. 
그래도, 가장 마음이 쓰였던 것이라면 응당 수 분 간 대화없이 서로만을 바라보던 선희와 재학의 그 주정씬일테지. 그런 눈빛을 한 적이, 그런 눈빛을 받은 적이, 서로의 그런 눈빛으로 말없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모든 선희와 재학이라면 아마 속으로 다들 쩡하게 울리며 퍼뜩 떠오르는 '누군가'를 한 명쯤 생각했을 거다.

올라가는 엔딩크레딧 속도에 맞춰 술 마시고 싶다는 열망이 두근두근 울려댔다. 변치않은 공통분모라는 생각이다. 홍상수 영화는 그것이 있다. 한 트친과도 나눈 이야기지만, 참 술 생각이 많이 나게 한다. 그것도 형광등 돋는 허름한 술집에서 다른 주종은 안되고 오로지 쏘오주 로다가. 이 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아, 긴 연휴 중의 오늘인데 저녁엔 지난 홍상수 영화를 한 편 더 보고 술을 마셔야겠다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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