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사월 이어 오월 붙여서 유월

재이와 시옷 2024. 6. 18. 18:11

 

4월 어느 날 심야영화를 보러 가는 길. 신호 기다리며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늦은 밤임에도 달이 밝아서인지 강남의 불야성 때문인지 머리깨가 유난히 밝은 것 같아 고개를 드니 마치 거친 붓으로 물감 찍어낸 듯이 저 예쁜 나무와 보름달이 한 칸에 걸려 있었다. 애인에게 물었다. 무슨 나무인지 아느냐고. 물어놓고 내가 맞춰보겠다 했다. 책에서 봤었는데, 책에서도 헷갈리지 말라고 구분해 내는 암기편법을 일러주었는데, 그게 무슨 책이었는지 저 나무는 뭔지 다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예쁘다는 건 알았어.
이 날 본 영화는 <범죄도시4> 였고 이 시리즈물을 볼 때마다 두 개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나, 잘 싸우려면 맷집이 좋아야 한다. 둘, 나도 슈슈슉 싸움짱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안 되겠지 나는 쫄보니까(...)

 

 

 

 

 

매출감소와 근무인원 부족으로 두 달 동안 애인과 휴무일을 맞추지 못했다. 일요일 한낮의 데이트는 잠시 포기해야 했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서 보내는 나흘의 낮과 밤이 좋아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뭐가 됐든 어떻게든 굴러간다의 정신으로 다시 되찾은 일요일 휴무. 안 할 수 있다면 일은 안 하는 게 좋다는 나의 신념으로 조기퇴근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간다. 무급 조퇴이기 때문에 하루 거의 십만 원의 금액이 차감되지만 아무렴 그건 뭐 다음 달의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오늘의 나는 알 바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렇게 얻은 오후 네시 이후 혼자의 시간, 혼자 마시는 몇 잔의 커피들. 작고 소듕해.
버티고개 내리막과 오르막 사이 건물 2층에 있는 스티키플로어는 2024 내가 좋아하는 카페 세 손가락에 든다. 바리스타 커플 사장님들의 오밀조밀함이 귀엽고 공간이 편안하다. 창가 알루미늄 블라인드를 넘어 들어오는 해가 따뜻한 곳. 그리고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다. 빵부터 들어가는 속재료 모두 산뜻하고 신선하다.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지금처럼 아무 말들이나 적곤 한다. 해가 저물어 바깥에 보라색이 내릴라치면 집으로 돌아간다. 

 

 

 

 

 

구경하는 횟수에 비해 구매하는 횟수가 현저히 적은, 그렇지만 가로수길에 가면 일단 꼭 들어가 보는 곳인 온더스팟. 일단 들어간다. 구경하다가 음 별 게 없군 하면 나온다. ㅋㅋㅋ 그러다 강남 나이키 매장에도, 나이키 공홈에서도 눈에 안 띄던 아이템이 뿅 나타나면 어머어머 이거 예쁘다 하며 구매를 갈기지 카드 챡. 이날도 일단 들어갔는데 저 귀여운 노랑둥이 운동화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세일도 많이 하네? 콩이가 신어보겠다고 하네? 나도 신었으면 좋겠다고 하네? 안 살 이유가 도통 어디에도 없네? 그럼 사야지. 우리는 신발만큼은 무조건 내돈내산이다. 각자. 우수리 떼고 이런 거 없이 금액 칼같이. 그러해서 첫 커플 신발이 생겼다. 

 

 

 

 

 

동네 꼬맹이와 엉아. 
내 마음대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몸집 작은 애기가 꼬맹이, 두툼한 까만콩이 엉아. 실제로 보면 몸집 차이가 많이 난다. 꼬맹이는 진짜 꼬맹이 같고 엉아는 진짜 엉아 같다. 동네에 밥이며 간식이며 챙겨주는 분들이 많은지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겁을 내기는커녕 오히려 궁둥이두드리머로 써먹는 느낌이 강해.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꼬맹 일루 와 츄르 먹자' 하면 스윽 귀찮아하면서도 기지개 쭈우 켜고 곁으로 온다.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꼬맹 나 가진 거 없는데 그냥 만져보자 일루 와' 하면 와준다. 황송해라.

 

 

 

 

 

주기적으로 사모님 돈가스를 먹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린 사람이라서요 제가.
두 달 동안 잃었던 휴무일이 원래대로 돌아오자마자 한 것은 그 주 일요일에 사모님 돈가스 예약하기였다. 정말 소듕하거든요. 작지도 않아 이건 그냥 소듕해. 여전히, 여느 때처럼 너무 맛있었고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이 음식으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똑같은 디키즈 워크 팬츠 입고.

성수동에 생긴 디키즈 매장에 구경을 갔다. 카운터에 이 바지 입고 서 있는 여자 직원분 뒷모습에 이걸 내가 입었으면 좋겠다고, 콩이 사주려던 바지들은 됐고 이 바지를 같이 입자고 했다. 리뷰를 보니 4업 추천들을 하길래 에이 그건 너무 크지 하면서 2업만 했는데 옷이 안 크네^^ 그냥 딱 맞는 정도^^ 차콜 입은 거 너무 예쁘다고 콩이가 베이지도 사줬다. 그건 4업으로 주문했지.

 

 

 

 

 

가만 서있기만 해도 정강이로 땀이 흐르는 여름이 도래했다. 뻐어킹 써머어.
저렇게 다 찢어진 바지를 입고 있어도 땀이 흐른다. 땀방울의 질감과 그 온도가 느껴진다. 미지근-따뜻한 그 방울이 스르르 흐른다 또는 등허리에 맺힌다. 여름 너무 싫어요 주궈주세요. 해가 길어져 하루종일 낮 같은 것도, 그 뜨거운 입체감과 공기도, 명랑해지라고 종용하는 듯한 사위의 초록도 다 내게는 별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라고 하니 예쁘게 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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