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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20240104 / 19890104

재이와 시옷 2024. 1. 4. 12:42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이래로 오랫동안 빨간 날에는 대개 일을 하는 여러 해를 보냈다. 공휴일, 명절, 성탄절, 보태어 신정까지. 오래도록 해온 일의 결이 같기 때문에 별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면 오히려 좌석이 여유로운 대중교통이 차라리 반가워진다.
바뀐 직장에서 일을 한지도 만으로 일 년이 넘었고 두 번의 연도 숫자가 바뀌었으니 2년 차라고 할 수 있겠다. 그사이 나라에서 나이를 깎아도 주고, 나는 빠른 인데 그럼 더 깎아주나요, 웃기지 마라 그런다고 나이 든 게 달라지는 줄 아냐 등의 미약한 갈굼을 지나 나이를 다시 먹었다가 깎았다가 그래서 결국엔 제자리인 2024년이 된 것이다. 새해 신정이 나의 직장 본체의 휴관인 관계로 작년도 그래서 올해도 나는 쉬었다. 물론 고정 휴무일이 아닌 타요일이었기 때문에 무급휴가였지만. 운 좋게 고정휴무일인 일요일 뒤에 신정이 붙어 일-월 이틀을 쉬었고 애인의 휴무도 맞추어 토요일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나흘을, 사이에 해가 바뀌었으니 꼬박 1년을 같이 보냈다.

 

 

 

 

12월 31일, 혼자서 다닌 시간까지 거슬러 가면 꼬박 십 년 정도 된 사모님 돈가스에 가서 애인과 돈가스를 먹었다. 돼지갈비 뒤를 잇는 나의 버금이 음식, 소스돈가스. 그냥 경양식돈가스와는 확연히 다른 사모님 돈가스만의 그 맛을 좋아하고 아낀다. 사랑을 시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장소에 애인을 데려가 맛을 보여주고 이사한 공간까지 따라가며 같이 이곳을 다닌 지도 7년은 되었다.
연희동을 찾기 전 애인이 케이크를 사가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음식 계속 잘 만들어주신 게 감사하고 앞으로도 건강히 잘 계셔주시기를, 한해 수고하셨고 오늘의 돈가스도 참 잘 먹었다고 그렇게 여러 마음을 케이크 한 상자에 담아 사모님께 건넸다.
식사날 두 분 모두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를 보았다. 할아버님 걸음이 느리고 불편해 보이셨는데 할머님 드실 따뜻한 물이며 휴지를 챙겨 드리려고 연신 식당 가운데를 오가셨다. 우리가 식사를 끝내고 먼저 나와 길목에 서 있을 때 두 분도 식당 밖 계단을 내려오셨다. 할아버님이 앞장서 내려와 뒤이어 조심스레 한 발씩 내딛는 할머님을 기다려주고 두 분 모두 길에 내려선 후엔 손을 꼭 잡고 꼭 닮은 느린 걸음으로 저녁 내리는 길을 걸어가셨다. 아름다운 장면을 마지막날의 저녁 풍경으로 담을 수 있어 운이 너무 좋다 여겼다.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우리가 되자고 애인과 함께 다짐도 했다.

 

 

 

 

새해에 읽을 책을 주문했다. 3일 오후에 도착할 것이다.

 

 

 

 

1월 1일, 전날 극장에서 이순신 전기영화를 보고 닭볶음탕 집에서 12시 새해 카운트다운을 했다. 소주잔을 부딪히며 건강하자고 사랑한다고 건배사와 덕담과 마음을 모두 같이 나누며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함께 나흘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기 전 건물 대리석 복도에서 나는 턱에 걸려 무슨 애니메이션에서 동네 바보가 짜부되듯이 문자 그대로 철퍼덕 넘어졌다. 대리석에 무릎을 찧어 오른 무릎이 깨졌다. 시퍼런 멍이 들었다. 철퍼덕 짜부된 내 뒤에서 애인은 세상 호탕하게 웃었다. 자기 살면서 다 큰 애가 이렇게 넘어지는 거 처음 본다고. (...)
콩이가 즐겁게 웃었으면 됐어. 무엇으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새해 액땜이라 여기기로 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어르신, 애인에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았다. 다 깨진 무릎을 굽히는 것이 여의치 않아 끙끙거리니 침대에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침대에서 여섯 번의 세배를 했고 주말 데이트에 해야 하는 네 번의 세배를 남겨두었다. 십만 원이니까 열 번 해야 한다고(...)

 

 

 

 

전날 과음과 몸의 피로도까지 합쳐 오후까지 무른 늦잠을 잤다. 살을 맞댔다가 떨어졌다가 안겼다가 안았다가 잠의 자세와 포옹을 변화무쌍하게 즐긴 후 눈곱만 떼고 동네 카페로 커피 산책을 나갔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다. 함께 돌아갈 곳이 분명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허세스러운 루틴. 외출 개비를 마치고 나와 새해 사진을 찍고 강남 교보문고에 가서 애인이 최종적으로 골라 준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다. 작년과 닮은 하루. 아마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닮을 하루. 닮은 행복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일까. 사랑은 정말이지 놀랍다.

 

 

 

 

십 년 전에는 한해의 슬로건을 정해 다이어리 첫 장에, 이 공간의 카테고리에 적어 두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거창하고 대단한 주제였던 것도 아니지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잘 살아 낸 모든 시간의 '나'와 '당신'이 그저 기특하니까. 그거면 되었다는 인정이다. 그래서, 내일도 오늘처럼 보낼 것이다. 그 내일처럼 스무 개의 절기를 보낼 것이다. 사랑으로 다행으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난 절기보다 조금 더 사랑을 드러내면서.

 

 

 

 

 

 

 

35년 전 1월 4일 오후 두 시에 나는 태어났다. 생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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