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난 날이 생일이잖아.'
작은 애정과 관심이 고파 찾아낸 방법이라는 게. 그때의 내가 꾸며내고 선택할 수 있던 최선이면서 비열하고 구질구질한 가짜 진실. 거짓이라 하기엔 아주 틀리진 않았고 진실이라 하기엔 꾸며내긴 했으니까. 그래서 이리도 오랫동안 묵혀 온 내가 가진 가짜 진실 하나. 내 생일은 11월 27일이 아니야. 나는 1월 4일 오후 두 시 반에 태어났어. 나는 1월 4일에 태어났어. 날 생 날 일. 내 생일은 1월 4일이야.
타이핑하는 이 순간에도 눈 아랫뼈가 저리다. 누구도 끈질기게 물어봐 준 적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래, 끈질기게 물어왔다면 나는 실토하듯 말했을까. 그때의 내가 그걸 바랐을까. 아니지 않을까. 처음 입에서 터져 나온 그날 이후 나는 오래오래 그걸 진실인 양 손바닥에 올려 내보이곤 했다. 너 빠른 이야? 빠른 년생인데 왜 생일이 11월이야?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를 마주하면 ARS 안내 음성처럼 늘어놓던 말들. 행여 구차해 보일까 으쓱거리는 몸짓을 섞어가며 나는 그래서 생일이 세 개야 멋있지. 지질한 안내.
사실 말이야. 있잖아 나는.
생일축하를 받고 싶었어. 가계는 꾸준히 가난했고 나는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 손에 키워진 막내손녀였어. 엄마아빠는 언제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밤과 낮이 딱히 구분되는 않는 두 사람의 엇갈린 귀가는 어린아이에게는 규칙이 되지 못했어. 어리광을 피워도 된다는 걸, 생일선물이 갖고 싶다고 말해도 된다는 걸, 오빠만 말고 나도 안아달라고 말해도 된다는 걸 그때의 나는 몰랐어. 알아야 할 시기를 놓친 어떤 규칙들은 평생 낯선 것이 돼. 어리광도, 당연한 축하도, 애정도 모두 낯선 것이 돼. 그건 아주아주 슬프고 속상한 일이야. 기억나는 생일 선물이 단 한 개도 없는 걸 보면 되려 나는 의아해지는 거야. 잘못이라고 꾸짖은 사람은 없지만 늘 거짓을 두르고 살고 있다는 뾰족한 모멸감을 내심 가졌으니까. 이렇게 보면 내가 조금 억울해해도 되는 것 같잖아.
그래서 난, 열일곱 살 이전의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선물 포장지를 처음 벗겨내고 싶었어. 이제 나는 이렇게 축하받을 거야. 나는 생일축하해 말을 들을 거야. 하면서 말이야. 1월 4일은 일월의 네 번째 날이야. 모든 학교는 겨울방학을 가져. 일월의 네 번째 날에 학교에 나올 일은 열두 번의 해가 바뀌는 동안 생기지 않아. 아홉 번의 해가 바뀔 때, 그래서 나는 결심한 거야. 의지를 다질 필요도 없었지 새로운 세계에서 난 이제는 축하를 받는 사람이니까.
축하의 말과 마음과 물질과 그것들 모두가 자리한 물리적이고 사물적인 것까지.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래서 의식조차 없었어.
'태어난 날이 생일이잖아.'
그 말에 눈두덩이를 꼬집힌 사람처럼 눈가를 빨갛게 물들이곤 가로에서 열리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떼며 내가 한 말은 '맞아 태어난 날이 생일이잖아 나는 1월 4일에 태어났어 내 생일은 1월 4일이야.' 정답이야. 이게 정답이야.
사랑이라서 이래도 되는 걸까. 어디까지 되는 걸까. 사랑이라고 이렇게까지도 되는 건가. 세계를 바꾸는 일인 걸. 나의 세계를. 사랑이 알려준 정답으로 나의 세계를 사랑과 살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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