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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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_비

조금, 처량히 내리는 비를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정말이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비 오는 날을 견뎌내지 못하던 스물두 살의 내가 있었다.지금도 기억하는 풍경엔, 셋이 있었다. 도로를 향해 테이블이 놓였던 자리는 통유리로 되어있던 대학교 근처 커피숍이었다.아르바이트밖에 모르던 때였다. 학점은 누더기가 되어 헤벌레 입을 벌린 채 멍청한 웃음을 띠고 있는데, 오픈조며 마감조며 가라지 않고 부모의 경제적 지원 없이 학자금 대출을 갚기에 바빴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라는 청춘의 명찰보다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근로자의 신분이 더 잘 어울리는 꼴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공강 시간.군대에 갔던 동기가 휴가를 나와 학교를 찾았다. 대학교 친구는 단 두 명이다. 소현이와 곰. 곰의 본..

seek; let 2013.02.27

침묵해야 하는 지

이상한 저녁이었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저녁이었어.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갔다.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코트 주머니에 든 것들을 화장대와 책장 등 그들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옷은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거실로 가 바닥에 옆구리를 붙이고 누웠다. 그 자세로 두 시간. 밤에 집으로 돌아온 임여사는 이불에 덮여진 나를 보지 못했는 지 컴퓨터를 하고 있던 두툼이에게 물었다. "딸은?" 아마도 두툼이는 턱으로 나를 가르키며 "저기" 라고 했을 거다. 뒤통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머리와 몸을 일으켜 멀그런히 앉았다. 그러다 일어섰다. 냉장고 앞에 서 지껄여지는대로 말했다. "기분이 슬퍼. 기분이 안 좋아." 너가 그런 말을 할때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precipice;__) 2013.02.21

03_한 공간 세 개의 이유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 이보영이 한 대사. 드라마 여주인공이 헤어진 지난 연인에게 바닥 저 밑까지 들켜버렸다는 걸 알아버리곤 제발 곁에 있지 말고 모든 걸 끝내 달라며 뱉은 대사. 쓱하며 빠르게 귓속으로 박혀 들렸다. 문장이 촉각이 되어.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처참함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엄습해 흐르는 눈물조차 냉랭해져 버리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지는 않았을까. 왜 모든 절망의 기억은 겨울에 밀집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낮은 공기의 온도 때문에 그만큼 더 선명한 걸까.   두 무릎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 작아진 몸의 태를 기억한다. 옆에 앉아 있었지만 손을 뻗어 당신의 굽은 허리를 펴줄 수도 없..

seek; let 2013.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