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precipice,

침묵해야 하는 지

재이와 시옷 2013. 2. 21. 14:36



이상한 저녁이었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 이상한 저녁이었어.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갔다.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코트 주머니에 든 것들을 화장대와 책장 등 그들의 자리에 올려놓은 뒤 옷은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거실로 가 바닥에 옆구리를 붙이고 누웠다. 그 자세로 두 시간. 밤에 집으로 돌아온 임여사는 이불에 덮여진 나를 보지 못했는 지 컴퓨터를 하고 있던 두툼이에게 물었다. "딸은?" 아마도 두툼이는 턱으로 나를 가르키며 "저기" 라고 했을 거다. 뒤통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머리와 몸을 일으켜 멀그런히 앉았다. 그러다 일어섰다. 냉장고 앞에 서 지껄여지는대로 말했다. "기분이 슬퍼. 기분이 안 좋아." 

너가 그런 말을 할때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말했다. 임여사는. 
쟤가 또 왜 저럴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음이 아플까. 내딸의 마음이 아픈걸까 그런 온갖 쓸모없는 걱정의 무게로 가슴이 눌려 콩콩콩 박동이 빨라진다 했다.

침묵해야 하는 지.

지난 토요일, 가방에 넣어 가져왔던 캔맥주가 생각났다. '지금쯤 아주 차가워졌겠다'
캔맥주를 들고 방으로 갔다. 허물벗 듯 옷들을 벗어놓고 품이 큰 면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침대와 벽이 닿는 지점에 등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무릎을 모아놓고 그곳을 선반 삼아 맥주를 의미없이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니까 마셔지는거였다. 
데일 듯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싶은데 집에는 욕조가 없다. 왜 욕조가 없을까 불평을 늘어놓기도 전 원래 가져본 적 없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이 어찌나 쓸모없는지 그 가벼움에 소름이 돋았다. 

전기매트에서 전자파가 피어나고 있다.

잠이 안와. 잠이 안와. 잠이 안와. 잠이 안와. 잠이 안와.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

끓는점이 없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입꼬리가 헤픈 것 같은 오늘의 내가 저녁 여섯시까지는 경멸스러울 것 같다.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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