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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4) 그렇게 그런 일들

숫자로 기억되는 것들

재이와 시옷 2014. 10. 16. 14:31

 

숫자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기억의 장면들이 숫자와 얽히며, 기억을 먼저 떠올리기에 앞서 숫자를 통해 그것들을 연상해내게 된다. 이를테면, 계절이 담기는 월(月)의 그 숫자를 보고 있노라면 따뜻하고 덥고 서늘하고 쌀쌀한 계절의 감각들이 연상되는 것처럼. 오늘은 그런 몇 개의 숫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다. 사실, 좋다 나쁘다 할 것은 없지만 이왕 적어지는 것들이니 기분이라도 좋자면서 되는대로 갖다 붙여본다. 

 

나는 숫자를 잘 기억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숫자와 연관된 기억들은 제법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부러 세어가며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대개는 자연스럽게 장면과 숫자가 얽혀있다. 내게는 한 묶음처럼 보이니 무엇 하나 떨어뜨려 생각되지 않는다. 떠오르는 몇 개의 숫자들과 그와 묶인 몇 개의 기억들을 되는대로 갖다 붙여보자. 

 

 

/ 1127, 0823, 0130
내게 의미 있는 숫자들이다. 사랑과 결부되는 네 자리들.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 그리고 너 라는 독립된 개체가 '와'로 묶인 날짜들이다. 그러니까 나 그리고 너가 아니라, 나와 너. 그래서 '우리'가 되던 날. 단 세 번의 연애만을 한 것은 아니지만(부끄러운 것도,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 숫자들이 특별하다. 겨울의 시작, 한여름, 한겨울. 신체처럼 내게 붙어있는 장면들은 대개 겨울의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겨울이 그토록 그리우면서도 한편 괴롭다. 

 

/ 1205, 0124
시작과 끝의 날짜. 이 또한 겨울의 복판에 있다.

 

/ 망설임 없이 누를 수 있는 번호
외우고 있는 연락처의 개수를 세어본다. 엄마, 아빠, 두툼이, 혜자,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에 매번 가슴을 다치는 당신의 번호, 12년도 겨울에 헤어진 전 애인의 번호.(숫자가 쉬운 것도 아닌데 이 번호는 도통 잊히질 않는다. 왜일까.) 더 많다고 자뭇 자신만만했는데 이름을 떠올리고 뒤이어 여덟 자리의 숫자가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이만큼이 전부다. 여섯 개라니. 조금 민망해지려 한다. 바로 위 단락에 '숫자를 잘 기억하는 편이다.'라는 첫 줄이 빼꼼히 노려보는 것만 같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어찌 대처가 가능하지 않겠나! 뻔뻔한가.

 

/ 63번, 15번, 512번
나의 스무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발이 되어주던 몇 대의 버스 번호다. 이것들을 타고 학교에 가고, 아르바이트를 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환승 정류장에 내려 벤치에 앉아 두 다리를 팔랑거리며 곧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당신을 단번에 보내기 싫어 여러 대의 버스를 외면하기도 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로 놓친 듯이 아쉬운 연기를 하곤 했다. 

 

/ 이별의 날짜가 기억나는 연애와 그렇지 않은 연애가 있다. 이것은 어떤 차이일까. 

 

/ 한 개의 전화번호를 5년째 사용하고 있다.
010으로 시작하는 여덟 자리의 숫자. 고유의 연락처. 스물두 살, 아마도 겨울. 쓰던 핸드폰을 잃어버려 새 핸드폰을 사기 위해 LG 매장에 갔었다. 당시로썬 획기적이었던 500만 화소 카메라가 붙어있던 비싼 햅틱이었다.(아, 추억의 이름이여.) 계약서를 천천히 쓰고 새 번호를 부여받았다. 맨 뒤 네 자리 중 2와 9가 있었다. 2009년 1월의 어떤 날이었다. 오가던 대화들이 기억난다. 2009년 새해에 이런 번호를 받으니 사람들에게 알려줄 때에도 헷갈리지 않겠다고. 지금은 5년이 지나 2014년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네 자리 숫자가 되었지만 당시의 매장 풍경과 유독 시린 듯 빛나던 형광등의 그 백(白) 색이 선명히 떠오른다. 불편했던 의자, 조명과 마찬가지로 새하얗던 테이블, 두툼이 친구들과 얼결에 함께 매장에 들어가 어딘지 협박하는 모양새였던 그 어색함, 새로운 기능들에 감탄하며 으쓱해하던 나의 유치함까지. 

 

/ 실습 번호 16번 
학년마다 다른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우리가 순차적으로 돌려받은 색은 빨간색이었다. 멋이 덜 나는 것 같아 군인들의 쓸모없는 멋부림처럼 사제(?) 검정 스카프를 따로 사 실습시간에 두르기도 했었다. 열아홉. 3학년 때 실습 번호는 16번이었다. 1학년, 2학년 때의 번호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유독 이 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당시 같은 과, 동갑내기 남자친구와 실습 번호가 같았기 때문이다. 실습 복장이 엄격했던 수업의 경우, 조리에 필요한 구성이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었다. 조리복은 물론, 앞치마 아래 받쳐 입는 베이지색 면바지부터, 스카프, 조리모, 평가를 위해 등에 붙이던 실습 번호가 적힌 코팅지까지.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므로 언제나 완벽히 준비물을 챙긴 적이 없었는데 그때마다 남자친구가 있던 3학년 1반으로 찾아가 그의 것들을 빌려 쓰곤 했다. 가장 많이 빌렸던 것이 실습 번호가 적힌 코팅지였다. 

 

/ 남자의 첫사랑과 같은 맥락은 전혀 아니지만 나는 첫경험의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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