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14) 그렇게 그런 일들

영화 보고 커피 마시는 나날들

재이와 시옷 2014. 10. 27. 01:10

 

/ 가을에 맞은 외가 친목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숙모네 집을 나섰다. 일요일은 알게 모르게 모두가 바쁜 하루다.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분주하게 주말 대청소를 하고, 누군가는 교회에 가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와의 약속을 위해 단장에 힘을 쓰고 누군가는 수산시장에 들러 말린 생선과 과일을 한 아름 산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아부지를 따라 묵묵히 수산시장을 돌며 양 손 무겁게 장을 보는 일요일의 딸내미였다.
이 날 아부지는 당신이 철원에서 드실 저녁 찬거리로 말린 생선 여러 꾸러미와 낙지젓갈 조금, 오늘 저녁에 가족 다 같이 먹을 대하와 임여사 준다며 자몽을 잔뜩 사고 생색도 그만큼 잔뜩 내셨다. 그리고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때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 벌금 딱지를 떼었다. 나는 벌금 내는 현장을 실제로 처음 봐 놀랍고 신기한 나머지 '세상에 나 이런 거 처음 봐! 와아!' 탄성을 질렀다가 아부지에게 쓴소리를 들었다. 안전벨트 미착용 벌금은 3만 원이며, 경찰 분들은 카드기도 갖고 있다. 벌금도 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니. 

 

 

 

 

/ 여의나루역에서 바로 보는 한강의 저녁이 이렇게 예쁜지 나는 몰랐지. 쏘와 무척 오랜만의 만남을 도모하며 장소와 시간을 정할 때에 때가 때이니 만큼 한강에서 돗자리 펴고 여유를 나부리자며 마음을 모았다. 목살바베큐를 사고 쏘가 마실 맥주와 내가 마실 스파클링레몬뭐시깽이를 사들고 가로등 바로 아래 자리를 잡았다. 이날은 유달리 하늘이 참 예뻤다. 
간헐적 음주를 하고, 친구 말에 따르면 '무려 부산에서 이별을 하고 온 스케일 남다른 년'인 내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쏘는 어째 똑똑한 녀석이 이상한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지 왜 때문에.

 

/ 아부지가 임여사 몫으로 청과물시장에서 산 자몽. 여덟 개에 만원 주고 사 왔는데 참나 자몽이 되게 맛있다. 원래 씁쓰름한데 달큼한 것이 모순적인 게 딱 맘에 든다며 자몽을 좋아했는데 이번에 사 온 자몽은 씨가 거의 없고 단맛이 월등히 높다. 쓴맛이 1할 정도뿐이 안돼서 지난 추석부터 이어지다 힘겹게 끝냈던 1일 1 포도의 바통을 받아 1일 1 자몽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어버렸지. 

 

 

/ 김애란 소설집. 좋다는 이야기야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정말 좋아버리면 더 마음이 울렁이잖아. 사흘동안 들고 다니며 틈틈 읽었다. 가장 마음에 닿는 단편의 제목이 지금 떠오르지 않네. 와우북페에 갔을 때 망설임 없이 집어 온 보람이 있다. 한 편을 정해 필사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장소는 어김없이 요즘 나의 장소, 테일러 커피. 이날은 시간 안배를 잘못하는 바람에 스케줄이 꼬여 밤을 새운 거지 같은 컨디션으로 오전 11시부터 테일러에 들이닥쳐 책 읽고 글 적고 그렇게 보냈었다. 

 

 

/ 테일러커피의 플랫화이트. 으어어엉 플랫화이트는 처음 먹어봤는데 역시 맛있어. 며칠 전에 테일러 커피 2호점이 근방에 오픈했다는 소식을 보았는데 곧 찾아가 봐야지. 엄지손가락에 끼던 별 의미 없는 도금 반지를 잃어버린 후에 나는 양 손에 다섯 개의 반지를 끼고 있다. 막 세 보이고 그래.

 

 

/ 킹크랩 가격이 그렇게 내렸다고. 기회는 지금 뿐이라며 열의를 빛내는 수박이의 제안으로 우리는 인! 생! 처! 음! 노량진 수산시장에를 갔다. 두둥. 오예. 오늘은 약속시간에 늦지 않겠다며 찡긋 서둘러 나왔는데 참나 잘못 봐서 노량진역의 전역인 샛강역에서 내려 수산시장 가는 출구를 찾고 있었다. 길치 레벨이 어째 점점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이다. 
이 날은 노량진 수산시장 첫방문 외에도 기념할 일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친구 혜자와 나의 친구 수박이가 함께 자리에서 만난 것. 근래 혜자 멘탈이 온전치 못하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날 오전에도 막 자기 만나라고 연락 와서는 시벌탱탱 거리길래 나는 저녁에 수박이와 선약이 있노라. 정 그렇다면 셋이 보자고 딜을 걸었지. 어차피 내 친구들은 혜자-할매 이 또라이들(♡)과 술 마시는 고딩 또라이들 이렇게 둘로 나뉘기 때문에, 서로의 이름과 이야기는 근 십 년을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 실제 만난 적만 없지 이미 다 아는 사이기 때문에 약속을 만드는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박이에게 한 번 더 의사를 묻고 도라버린 내 친구의 사정을 구하고ㅋㅋㅋ 우리는 저녁 일곱 시쯤에 셋이 되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대하구이와 청하를 마시며 행복감을 맛보았지.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라서 대하구이를 주문하면서도 '나 새우 껍질 못 까. 이거 주문하면 껍질 다 까줘야 돼.' 멍청이 돋게 말했는데도 발갛게 익은 대하를 수박이가 쇽쇽 껍질 까주는데 이건 어찌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지. 나처럼 오랫동안 술을 안 마시던 수박이도 소주를 홀짝, 요즘 근심으로 매일이 술이라는 내 20년 지기도 청하를 홀짝, 우리는 점점 미쳐갔지.

 

/ 전어회와 대하와 술을 마시며 거진 십만원을 쓰고(...) 대하구이 끝물에 내가 불현듯 광장시장 육회 탕탕이를 말하자 아이들 모두 눈이 반짝. 아니 뭐가 문제야? 택시 타고 바로 쏘자. 속전속결. 우리는 노량진에서 광장시장으로 갑니다. 월요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네요. 하지만 나는 광장시장에서 자리 잡는데 선수지. 저어기 식당 안쪽 빈 테이블이 보인닷! 앉자마자 육회 탕탕이 주문하고 소맥을 콸콸콸. 

 

 

/ 육회 먹다가 혜자랑 수박이가 여기 시장에서 유명한 순이네 빈대떡 안 먹어봤다고 하길래 그럼 나가서 사 오라고. 테이블에 놓고 먹어도 된다고. 아이들은 내가 처음 광장시장에서 '아니 그런 상도에 어긋나는 짓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했던 것처럼 힉 놀랬지만 곧 조심조심 빈대떡을 수박이가 사 오고 우리는 첫끼 먹는 애들처럼 그것들을 비워냈지. 다음엔 마약김밥이랑 빈대떡만 조지러 가자고 수박이랑 다짐했다. 아, 난 어떤 음식을 조진다고 표현하는 게 상스럽지만 왜 이리 귀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상스러운데 귀여워 껄껄껄.

 

 

 

 

 

 

/ 테일러커피 아이스라떼 정말 맛있다. 이 멘트를 요즘 몇 번을 하는지. 그런데 정말 맛있어. 진지해.

 

 

/ 요즘은 딱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단 커피를 한 잔 내린다. 전날 먹은 것이 영 시원찮았다면 식빵 한 장을 토스트기에 넣는다. 딸기잼을 얇게 발라 커피와 먹는다. 씹을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으면 커피만을 마신다.
임여사의 출근을 바라본다. 바깥 기온을 굳이 확인하지 않고서도 잊지 않는 말로 꼭 '따뜻하게 입었지?' 묻는다. 드라마 몇 편을 본다. 소설집을 펴 단편을 읽는다. 허기가 이제 느껴지나 싶으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 보고 싶은 영화의 시간을 확인하고 씻고 나온다. 상상마당에서 영화를 보고 걸어서 테일러 커피에 간다. 무척 추워지기 전까지는 바깥 자리에 앉자는 나만의 다짐을 세웠다. 사람들이 뿜는 담배연기를 한참 본다. 가져온 소설집의 다른 글들을 더 읽고 다이어리에 오늘을 적고 방금 보고 온 영화를 블로그에 기록한다. 저녁은 그냥 안 먹는다. 생각이 없으니.
임여사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걸어오는 전화를 신호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는 나날들이다.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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