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서럽지는 않고 서글프기는 한

재이와 시옷 2023. 11. 24. 11:38

 

 

 

 

내 몸으로 직접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처방전으로 꾸려진 조제약이 아닌 약국에서 '감기몸살약 한 통 주세요' 해서 구매한 약의 약발이 더 잘 든다는 사실 같은 것들. 잘 아프지도 않고 크게 다치지도 않아서 일 년 중 병원을 찾는 일은 세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히 꼽을 수 있다.
나이 서른을 넘기고 한 이-삼 년 전부터 자잘한 잔병들이 생기기는 했지만(종종 체한다거나 스트레가 심하면 질염이 슬금 올라온다거나) 이마저도 병원을 찾을 정도는 아니고 하루이틀 잘 먹고 잘 자면 다 낫는다. 그냥 몸이 다시 좋아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독 '아프다' 하는 것에 공감이 되지 않는다. 상대가, 대상이 누가 되든지 간에 이 심드렁함은 곧 상처가 된다는 걸 사회성으로 배운 터라 '척'을 한다. 내가 너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척을. 그러한데,

 


감기에 걸렸다. 감기 몸살.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는 없었지만 다치면 갑자기 크게 다치거나 일 년 중, 한 번 정도 크게 앓았다. 내가 기억하는 명확함으론 적어도 열일곱부터는 늘 한 번씩 많이 아팠다. 누가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발을 움직일 기력이 없어 눈만 끔-뻑 거리며 별안간 반성을 한다. '그래, 아프다는 건 이런 거잖아. 아프네.' 하면서. 아프다고 하는 이를 면전에 두고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눈빛으로 싸늘하게 되물었던 그 순간의 나를 반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픈 건 아픈 거지. 할 일은 해야지. 네가 아프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고 내가 무엇으로 해결해 줄 수도 없어. 나의 사고를 반성하진 않는다. 왜냐면 그게 맞으니까! 내 말이 맞으니까!

 


사흘 전 감기에 걸렸고 나는 지금 사흘 동안 아프다. 
오랜만에 이 공간에 불을 지피는 것이라 '있어 보이는 무엇을 써야지' 사뭇 비장한 태도까지 취했었다. 이제까지 늘 그랬던 것이 문제였는지 무엇도 써지지 않아 그동안 공간이 식게 내버려 두었다. 지금도 감기에 걸렸다는 얘기를 길게 늘여 적으며 이게 뭐 어쩌라는 건가 싶지만 그냥 아무 말이나 쓰고 싶어졌다.
왜냐면 지금 조금 서글프니까. 더해서 또 왜냐면 사흘 뒤면 내 생일이니까. 이틀 뒤엔 애인과 가까운 곳으로 생일기념 일박 여행도 가니까. 알약을 이십여 개 가까이 먹었는데 몸이 낫지 않고 있으니까. 몸통 안에서 들끓는 열이 바깥으로 가까스로 삐죽 솟아서인지 얼굴도 어제부터 유독 못생겼으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조금 서글프다. 
아득바득 나아야지. 나아서 이달의 만남들과 이달의 개(송코미)와 찍은 사진과 이달의 애인에게 받은 선물과 사랑까지 모두 담아 기록해야지. 나아야지. 아픈 건 내 몫이고 낫는 것도 내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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