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9월
해가 가장 높은 시간 여전히 30도가 넘는데 달을 보여주는 숫자가 8에서 9가 되었다는 그 실감으로 소매가 짧은 면티와 바지들을 정리하려 태를 잡는다. 어서 겨울에 닿고 싶어서, 흰 입김을 보고 싶어서, 당신에게 더 붙고 싶어서.
대부분을 끄집어 내 바닥에 내려두고, 다시 접고 걸어서 행을 맞추고, 걸쳐 보고 둘러보고 발을 넣다 말고 한 발치에 던져두고, 지난 계절에 분명 아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버려야 할지 애매해져 버린 것들과 눈싸움을 잠시 했다가 결국엔 이기고 결국엔 지고, 내 몸 구겨놓은 것 같은 부피의 봉투 한 봉이 만들어지면 그래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자, 부유하는 먼지들을 줄줄 흐르는 콧물로 가늠하면서 그렇게 한 계절을 접는다. 어떤 때엔 때 일러서, 어떤 때엔 지난번을 참고했다가 때 늦어서. 수십 번의 계절을 수백 번의 절기를 지나면서도 도통 딩동댕에 닿지 못한다.
옷을 정리하며 계절을 접고 시간을 개는데 손가락을 접어가며 슬픔을 센다. 가을을 통과해 겨울에 닿고 그 중앙에 놓이는 날, 모자란 손가락에 이젠 셈을 어떻게 해야 할까 피식 웃음이 샌다. 나는 언제고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다 갖다 붙여 가며 그 더해질 일월들을 꼽게 될 것 같으니까. 여기에도 있는 당신이 저기라고 없을까. 그곳마저 있는 당신이 저 외딴곳에라고 없을까. 나는 언제까지 당신을 이렇게 꼭꼭 씹을까.
02 영원
고백의 순간은 영원 같다. 내게서 뿜어져 나온 분홍의 사랑은 이제 상대의 것이다. 공중에서 멈춰버린 먼지를 본다. 나는 정지한 그 시간에서 영원을 살고 당신의 것이 된 나의 영원은 당신으로 하여금 다시 흐를 수 있거나, 진짜 영원의 세계로 쫓겨난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얕지 않은 언덕을 힘을 내 페달을 밟아 오르던 당신의 등을 바라봤었다. 여름이었고 8월이었고 중순을 한참 지나 23일이었다. 작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나를 태우고 힘을 내느라 안 그래도 열이 많던 당신은 분명 고됐을 텐데 그것들이 당신 등에서 피어나던 뜨거운 공기를 통해 느껴졌다. 그 열심을 다하던 등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꼭 당신에게 고백을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생각해 둔 말도 없었지만 고백의 순간 기껏 내 입을 통해 나온 말이란, 어디 가지 말고 이제 제발 내 곁에 있어 달라는 구질하기까지 했던 고해였다. 바보라서 어디 못 간다고 했다. 가 본 적도 없고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곁에는 가고 싶지도 않다고. 그 고해의 자리까지 몇 년을 돌고 돌아 도착한 나인데도 본인은 바보라서 계속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내가 언젠가 홀로 당신을 버리고 갔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아침으로 가던 새벽이었고 쏟아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둘 다 잠이 들었다. 옛날 독립 영화에나 나올 법한 단칸방의 순정처럼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실 한편 날것의 아침이자 서로의 고백이었다. 우리는 그것들이 그렇게도 기꺼웠다.
작은 검색창에 이름 석자를 꾹꾹 눌러 적을 때 내 기분이 어떤지 알까. 당신을 찾는데 쓰이는 문자들이 몇 개 안 된다는 사실에 매번 분통이 터지는 걸 알까. 나의 영원은 이제 영영이 되었다.
03 능력
아픈 걸 잘 참는다. 이 능력이라면 능력을 깨달은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른다섯 살 지금까지도 스케일링 때문이 아닌 진료를 위해 연례행사 치루 듯 치과에 간다. 재작년엔 왼 위아래 사랑니 두 개를 뽑아내고 근무지에 돌아와 밤까지 일도 했었다. 몇 달 전 잇몸에 나사를 박아 넣으며 임플란트 진료 막바지에 다다랐던 날, 제법 까다로운 위치에 나사를 박는 거라 힘에 부치고 아플 텐데 소리 한 번 안 내고 정말 잘 참는다고 했다. 나 아픈 걸 잘 참나? 갸우뚱했다. 십 년 전쯤 처음 받고 또 해야지 하며 미루기만 했던 왁싱을 2주 전에 받았다. 가운이 들어있던 탈의실 옷장엔 사람들이 많이 쥐어뜯었는지 조금 초췌해 보이는 인형이 같이 있었다. 가차없이 왁스를 뜯어내던 관리사분이 말했다. ‘정말 잘 참으시네요. 남자분들도 많이 오시는데 이 정도로 소리 안내는 고객님 진짜 오랜만이에요. 디자인도 잘 나오는 타입이시라 저 지금 너무 즐거워요 고객님.’ 아랫도리를 무방비하게 드러내고 처음 보는 이에게 듣는 칭찬이 쑥쓰러웠지만 와중 내 능력을 인정했다. 역시 나는 아픈 걸 잘 참는구나.
열이 피어난 얼굴을 쇄골뼈에 기대고 잔뜩 부비면 '많이 아프네 뜨겁다.' 하며 꽉 끌어안아줌으로 고됐을 나의 하루를 치하해 준다. 그제야 '나 많이 아팠구나.' 종일 쥐고 있어 손끝마저 아릿했던 하루의 긴장을 푼다. 아프다 힘들다 괴롭다 말을 할 수 있는 거구나. 내가 모르면 저 사람이 알아채주는구나. 이제까지는 그걸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도 눈치채주지 못했다.
어떤 산문집의 제목처럼,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울어버리라고 하고 싶다. 아픔을 고통을 괴로움을 참아서 슬픈 능력을 갖게 되는 것보다 어리광을 잔뜩 피워서 위안도 위로도 다독임도 쉽게 품에 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능력은 맞지만 잘 쓰지 않을 거다. 그게 나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해 줄 거니까.
04 위로
누가 나 좀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고 느낀 적이 언제였을까. 주지도 않고 받기만 하겠다는 못된 심보를 가진 건 또 아니어서 내가 주지 못한 위로를 갈취하 듯 받아내고 싶지 않았다. 형태를 갖추지 않고 오고 갈 수 있는 모든 것들엔 마음이 담겨야 하니까. 위로에 재능이 없다. 나는 빈말에도 서툴다. 누군가는 위로와 빈말이 서로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내겐 그 두 개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을 더 못하는지는 모르겠다. 빈말이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의 말이라면 그게 거짓말과 다른 게 무얼까.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건네는 말이 위로일 텐데 그 마음이 부재중이라면. 결국 위로는 거짓말이지 않은가. 받고 싶은 적 없었고 거짓으로 주고 싶지도 않다. 내가 할 수 있고 받고 싶은 위로를 생각해 본다. 꼬리를 무는 마음으로 내게 건넸지만 내가 받지 않아 흩어진 위로들도 생각해 본다. 그냥 꽉 끌어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앞에 선 내가 ‘꽉 안아줘’라고 말하면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무엇이든 괘념치 않고 바닥에 내려둔 후에 아무 말 없이 그저 꽉 끌어안아주었으면 좋겠다. 한동안. 아무 말없이. 힘들어 외로워 괴로워 그 모든 말들이 덩어리 져 우리 목 아래에 있다. 휘발성도 수용성도 아닌 그것은 시간과 품으로 흩뜨릴 수 있다. 오래전, 그렇게 끌어 안긴 채로 눈을 감고 생각했었다. 이제 괜찮다 그래 괜찮다. 그럼 괜찮지 않을까. 위로가 되지 않을까.
05 포기
포기 라는 단어 안에는 어떤 가망성이 숨겨져 있다. 어쩌면이라는 가능성. 포기는 완전한 실패가 아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누구도 무엇도 확정할 수 없던 때, 그 직전에 하는 선택이다. 포기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수 있고 마찬가지로 포기하지 않았다면 더 큰 실패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한 번 감춰져 있다. 어쩌면의 기대는 여기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타인의 포기를 두고 섣불렀다고 평가한다. 부딪혀보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었다고 상대를 낮잡아 본다. 그 시선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겐 없다. 난 모호한 것을 싫어하면서 또 너무 뛰어난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원만한 성공과 타격 없는 실패가 좋다. 모호함보단 분명하지만 탁월함보단 흐릿한 그 정도가 좋다. 그래서 포기를 쓰고 싶지 않다. 감춰진 기회에 따른 가망성을 셈하기 싫다. 포기한 것과 잃은 것은 다르다.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잃어버렸을 뿐이다.
06 규칙
겨울과 닿아있는 규칙들이 있다. 해가 짧아지고 뱉는 입김이 점차 하얘져도 목도리만큼은 12월부터 꺼낸다. 11월도 이미 겨울이지만 목도리를 둘둘 감아야 하는 진짜 겨울은 12월부터라고 여긴다. 누군가는 날이 이토록 추운데 왜 목을 휑하니 내놓고 다니느냐 타박을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를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가져온 겨울의 규칙 첫 번째다. 12월에 더 가까운 나의 생일에 목도리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소중한 이에게 받았었나 그에게도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어서 매일매일 꺼내놓는 것이 부끄럽고 닳을까 아까웠었나 목도리도 거기에 함께 담긴 그 마음도 거기에 투영될 내 마음도.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을 맨몸으로 맞는다. 우산을 쓰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겨울의 규칙 두 번째다. 목도리와는 다르게 명확히 기억한다. 스무 살의 겨울. 내가 사는 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엔 6차선 큰 대로가 있었고 버스정류장도 있었다. 학교에 갈 때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때도 그 정류장에 있었다. 당신이 내게 올 때도 아쉬움을 가득 떨군 채 다시 당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도 우리는 그 정류장에 있었다. 우리가 되고 처음 많은 눈이 내렸던 날, 동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보다 나를 더 아끼던 당신이라 많은 눈이 내리고 있으니 당연히 우산을 챙겨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정류장에 내려 만난 당신은 어깨와 머리와 눈썹에 눈을 잔뜩 올려놓은 채 나를 보고 웃었다. ‘눈은 그냥 맞는 거야 같이 맞고 싶어서 우산 안 가져왔어’ 나를 보고 말했다. 깍지 껴 잡은 두 손의 온기 위로 눈이 쌓이지 않았다. 어깨와 머리와 눈썹엔 잔뜩 쌓였는데 우리 두 손과 마주 보는 마음엔 눈이 쌓이지 않았다. ‘아, 눈은 그냥 맞는 거구나 이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때부터였다. 당신을 잃고 깍지 껴 잡을 두 손도 마주 보는 마음도 지금 이곳엔 없지만 나는 여전히 우산을 쓰지 않는다. 언제라도 어깨와 머리와 눈썹에 고스란히 눈을 얹고 걷는 나를 당신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07 두려움
당신이 이토록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나 그게 너무 무서운데
속상하고 마음 아픈데 두려운데
이러다 어느 날에 사진 없이는 당신 눈코입도 그려내지 못할까 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잊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단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당신을 잊으려는 생각도 시도도 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되는 날이 혹여 올까 봐
내가 원치 않던 그날이 언젠가는 꼭 내게 들르게 될까 봐
그게 너무 겁이 나 두려워 무서워
당신을 잃을까 봐
또다시 잃을까 봐 무서워
그때는 영원일 거니까 영원히 잃는 걸 테니까
08 우주
영화 <트루먼쇼>를 여러번 봤다. 영화에서 트루먼의 삶은 창조론처럼 어느 날 빛이 있으라, 어느 날 인간이 있으라 하며 뚝딱 만들어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트루먼을 선택하고 그의 삶을 제작한 프로듀서가 곧 트루먼이 사는 세계의 신이다. 오래전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땐 트루먼이 불쌍했다.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허리 숙여 건네는 마지막 인사는 젠틀하면서도 너무 근사하게 느껴졌다. 크게 한방 먹은 제작자를 바라보며 통쾌해하기까지 했었다.
당신을 잃고 언젠가 다시 보게 된 영화는 더 이상 가엾지도 근사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내가 느낀 감정은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허무맹랑한 희망이었다. 내가 사는 이 세계에 당신은 이제 없지만, 저기 다른 평행세계엔 나도 있고 당신도 있지 않을까. 수만 개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으로 빚어진 현실 역시 수만 개라면 당신이 없는 이 세계보다 당신이 아주 잘 살아가고 있는 하나를 뺀 수만 개의 삶이 저기 어디에 있지 않을까. 간절하게 바라는 건 하나뿐인데 신이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니 신을 믿지 않는다. 종교도 없다. 하지만 우주의 논리는 믿고 싶다. 그것만이 내 바람을 의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니까.
09 집중
마음 한 톨 쓰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해내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에도 한 톨 이상의 체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나 하나를 단단히 건사하는 데엔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할까. 나는 정말이지 잘 있고 싶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고꾸라지지 않고 잘 서있고 싶다. 십 년을 넘게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다. 돌고 있는 동그라미만 커졌을 뿐 여전히 헤매고 있다.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휘청이고 내가 껴안고 놓지 못한 슬픔에 발이 걸려 나자빠진다. 무릎을 다 깨뜨리고 피만 흘리고 있는 어린애처럼 넝마가 된 마음을 안고 꺼이꺼이 울기나 하는 못난 서른다섯이 되었을 뿐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누군가는 잊고 잊히고 또 누군가는 잘 잊기 위해 노력을 한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나 하나다. 나는 잘 있고 싶고 당신을 잘 잊고 싶다. 내 안에 들어있는 당신의 무게가 얼만큼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것에 눌려 일어서지 못하는 나를 오래도록 외면했다. 자기 환멸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그럴 수 있다며 스스로에게 냄새 나는 면죄부를 들려주곤 했다. 그렇게 엉망으로 욱여넣어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일어서야 한다고 기세를 부리는 거다. 당신의 무게에 눌려 또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받쳐 들고 힘을 줘 꼿꼿이 서 있고 싶다. 마음의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집중한다. 가지 말까 하지 말까 내일 할까 하다가도, 일단 가자 그냥 가자 가고 보자.
잘 잊기 위해서.
나로서 잘 있기 위해서.
나로서 잘 살기 위해서.
10 초보
아침부터 즐거울 수 있던 날이었다. 아르바이트 오픈을 도맡았던 날. 늦게 떠진 눈에 나를 질책하며 부랴부랴 택시에 올랐는데 그날 첫 운행을 나온 서른 살 초보 기사님과의 작은 해프닝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택시비의 절반값도 내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되려 좋은 하루 보내라며 인사를 건네는 기사 아저씨의 살가움에 짐짓 기뻐했던 것 같다.
오픈은 처음이었던 나였는데, 지문 묻은 유리문 너머 부스스 찔러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가이드라인 삼아 홀 대걸레질을 해나가는 게 퍽 즐거웠다. 점장님은 잘하고 있는 거냐며 빼꼼 주방에서 얼굴을 한 번 내비치시곤 이내 심드렁해지셨는지 도통 홀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다. 방울토마토 한 박스를 꼭지 모두 따내어 찬물에 여러 번 헹구고, 양상추의 푸른 잎들만 골라 찢어 컨테이너를 가득 채운다. 도마에선 칼질이 오가기도 하고, 무거운 것을 드느라 냉장고 앞에서 낑낑 씨름도 한다. 뜨거운 김을 내며 앞에 놓인 하얀 그릇들을 마른 리넨 천으로 뽀도독 닦아내고 찰그락찰그락 스푼과 포크를 닦는다. 구석구석 조명이 하나 둘 완전히 켜지고 11시 반, 가게 문을 연다.
정돈된 실내와는 다르게 아직은 부스스한 내 모습. 다리미 주름이 곱게 들어간 유니폼과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 레어템이라 추앙받던 초록색 짧은 앞치마를 두르고 고개는 한쪽으로 내린 채 바보처럼 서있어 본다. 그래도, 그게 잘 어울리던 나이였다. 스무살 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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