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 짧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는 약간의 열망은 그보다 못한 지금 나의 현실과 나의 못남에서 비롯된 열등의 꽃인걸까 아니면 그저 순수한 작은 열망으로 봐도 무방한걸까.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서 보는 뷰(view)는 언제나 같다. 똑같이 지겹고 언제나 같은 템포로 업무시간은 지나간다. 오늘은 좀 나만의 템포를 갖는다. 1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경영성과보고회의 때문에 팀장님은 자리를 비우셨고, 내 앞자리에 나란히 앉는 두 대리님은 부산으로 출장을 갔다. 내 옆과 팀장님 사이에 낑겨앉은 이후부터 안색이 그닥 좋지 못한 스물여덟 동기 사원도 외근을 나갔다. 고로, 우리 부서 자리에는 지금 나 혼자있다. 타이핑이 길어지고 있으니 타부서 사람들의 눈동자들이 몇 번 스치고 지나간다. 거 참 보고서 쓰는 중이라 해둡시다. 내가 지금 진종일 놀면서 이러고 있는게 아니라구요. 일을 얼마나 가열차게 했는데.
몇 달 전, 월요일 전체회의에서의 사장님 질문이 떠오른다.
"찬숙씨는 왜 일을 하죠?"
앞서 같은 질문에 타부서 오팀장님은 비전과, 자아 따위를 열거하며 딸랑이를 흔들었다.
"찬숙씨는 왜 일을 하죠? 무엇때문에?"
- 저는 놀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회의실 큰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팀장님 입가에 터지지 못하고 걸린 웃음이 데롱거린다.
"음?"
못 들은 것이 분명 아닐텐데 사장님은 고개짓을 하며 '다시 한 번 물어볼테니 그럴싸한 대답을 해봐라. 이 신입나부랭이야'라고 물어보듯이 나를 쳐다봤다.
- 제가, 재미있게, 놀고, 살기 위해서,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쉼표의 템포로 나눠 천천히 말했다. 사장님은 급히 질문의 주제를 바꿔 오늘 아침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장염환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어제와 오늘은 도시락을 싸오지 않고 회사 빌딩 지하에 있는 삼계탕집에 가 죽을 포장해와 먹었다. 사람들은 내가 장염에 걸린줄 알고 있으므로. 하지만 살이 전혀 빠져보이지 않는다는게 궁극의 함정 되시겠다.
좋아하는 개발팀 귀여운 대리님이 애인과 헤어졌다고 했다. '찬숙 완전 끝났어. 엔드야 완전 디엔드' 화장실에서 새초롬하게 양치를 하다 놀란 내가 '아니 왜!' 라며 물었지만 왜가 얼마나 멍청한 질문인지 물은 나도, 듣는 대리님도 알고있었으리라. 모든 것엔 이유가 있지만 모든 것이 분명한 것은 아니니까.
엄청 맛있게 구운 깻잎전과 맛깔스러운 빨강양념이 벤 꼬치를 두고 막걸리 혹은 맥주 혹은 청하 혹은 그러니까 아무튼간 소주말고 어떤 술이든 마시면 참 좋을 것 같다. 엇, 외근나갔다 돌아온 분 말에 의하면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고. 술을 마시라며 재촉하는 날씨다. 하지만 집에를 가야지. 어제와 그저께 또 3시간밖에 못잤다. 오늘은 기필코 일찍 자야한다.
회의가 길어지고 있다.
오늘은 칼퇴를 해야겠다.
미디어팀의 공대리님이 온라인에서 진행 중인 이벤트 사은품을 주셨다.
무려 슬램덩크 작가가 그린 어떤 갤러리집. 디테일은 이따 집에가서 뜯어봐야지. 신난다. 세뱃돈 받은 기분이다. 아, 회사에서 주는 설날 선물로 캐슈넛 따위가 나온다며 썽을 있는대로 냈는데(물론 속으로, 물론 사장님 뒤에서) 오늘 청정원 선물세트 받았다. 울집두툼이는 동원참치세트 받아왔는데 내가 받은 세트 구성은 카놀라유와 우리팜 정도의 스팸st, 그리고 참기름, 천일염(난 이런 양념 받는거 너무 좋다.) 등이다. 두툼이가 받은 것과 구성이 겹치지 않아 나도 좋고 임여사도 행복하겠다. 신난다. 술만 먹으면 딱 좋은데 신체 리듬도 별로고 돈도 없다. 마성의 현대카드뿐.
일 마무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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