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seek; let

08_지난 일기

재이와 시옷 2013. 6. 15. 00:05

 

 

지난 일기를 본다. 2008년의 이야기다.
0이 두 개 들어간 낯선 숫자를 보며 지금으로부터 뺄셈을 한다. 아, 꼬박 6년 전이구나 벌써 그렇게. 그래 맞아. 나의 스무 살에, 빛이 나던 스물두 살 당신을 만났었으니.

 

 

아침부터 즐거울 수 있던 날이었다.
아르바이트 오픈을 도맡았던 날. 늦게 떠진 눈에 나를 질책하며 부랴부랴 택시에 올랐는데 그날 첫 운행을 나온 서른 살 초보 기사님과의 작은 해프닝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택시비의 절반값도 내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되려 좋은 하루 보내라며 인사를 건네는 기사 아저씨의 살가움에 짐짓 기뻐했던 것 같다.
오픈은 처음이었던 나였는데, 지문 묻은 유리문 너머 부스스 찔러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가이드라인 삼아 홀 대걸레질을 해나가는 게 퍽 즐거웠다. 점장님은 잘하고 있는 거냐며 빼꼼 주방에서 얼굴을 내비치시곤 이내 심드렁해지셨는지 도통 홀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다. 방울토마토 한 박스를 꼭지 모두 따내어 찬물에 여러 번 헹구고, 양상추의 푸른 잎들만 골라 찢어 컨테이너에 채운다. 도마에선 칼질이 오가기도 하고, 무거운 것을 드느라 냉장고 앞에서 낑낑 씨름도 한다. 뜨거운 김을 내며 앞에 놓인 하얀 그릇들을 마른 리넨 천으로 뽀도독 닦아내고 찰그락찰그락 스푼과 포크를 닦는다. 구석구석 조명이 하나, 둘 완전히 켜지고 11시 반, 가게 문을 연다.
정돈된 실내와는 다르게 아직은 부스스한 내 모습. 다리미 주름이 곱게 들어간 유니폼과 레어템이라 추앙받던 초록색 숏 앞치마를 두르고 고개는 한쪽으로 내린 채 바보처럼 서있어 본다. 그래도, 그게 잘 어울리던 나이였다. 스물한 살이었으니까. 
오픈을 하는 날은 하루를 길게 쓰는 그 느낌이 좋았다. 분명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이었지만 덤으로 '너는 두 시간 더 줄게.' 하는 호사를 받는 느낌이었다. 오후가 되고 퇴근 카드를 찍고 나왔다.

 

 

비스듬하게 지하로 경사진 시멘트길 아래에서 당신을 올려다보는 내가 있다.
리바이스 청바지에 흰색 스니커를 신고 하늘색 나이키 티셔츠를 입고 왔다. 며칠 전 내가 예쁘다고 칭찬했던 옷이었다. 당신은 매번 그렇게 내게 들은 문장들을 놓치지 않았다. 경사진 길에 맞춰 짝다리를 짚고 서서 점장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손엔 담배라도 물려있어야 할 것 같은 불량한 모양새였지만 오래 알고 지낸 점장님과의 살가운 대화 안에서 충분히 개구쟁이의 모습으로 희석되고 있었다.
인기척에 돌아보고 나를 찾고는 웃는다.
단숨에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오른 걸음으로 몇 미터. 당장 닿을 수 없는 거리임에도 마냥 한치에 있다는 듯이 그렇게 팔을 뻗고 서있다.
종종 빠른 걸음으로 올라선다.
손을 잡는다. 
더 빛난 웃음이 당신의 얼굴에 내린다.
늘 사랑을 온몸으로 투영하던 당신이었다.

 

 

지난 일기.
지난 일기에 당신이 있었다.
완전해져 간다. '지난' 일 수밖에 없는 당신이라는 밑줄이.
무엇이 나는 그리 애통한 지 이렇게 글자들에 넋을 넣는다. 지난이고 싶지 않아 5년 전의 풍경을 다시 풍경삼아 지질함을 그린다. 삼켜지지 않는 실곤약의 끝 타래처럼 치솟는 음울을 입을 틀어막고 그렇게 내린다. 

 

 

미운 사람. 미운 사람.
그럼에도 미워지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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