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수 없잖아.'라는 문장으로 버리 듯 잘라 낸 인연들이 몇 있다. 나의 못됨을 꿋꿋이 확인해 가며, 그렇게 치워 낸 시간과 사람들. 나는 매일을 끊임없이 나를 견뎌내고 있다. 당신을 잃은 후 매일매일.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같은 질문, 같은 이유로의 반복. 나는 사랑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어떤 면에서도 너의 문제일 수 없다고. 오롯하게 나만의, 나의 문제와 결함이니까.
닮은 얼굴을 만났다.
무척이나 닮은 얼굴.
당신의 가족을.
정이 많은 당신은 지인들을 챙기는 일에 스스럼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학교 밖에서도 당신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았다.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당신이 좋아하던 친구였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밤 열한 시가 넘어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함께 일한 그 친구와 무슨 할 말이 그때는 그리도 많았는지 연신 떠들어대며 두어 시간을 걸어 집에 가곤 했었다고. 당신이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와 떨어져 지내던 그 시간에도 그 친구는 함께해 주었고, 많은 힘이 되었다고. 그 친구가, 당신에겐 소중한 친구면서 나에게는 의남매나 다름없는 그 친구가 지난달에 결혼을 했다.
당신, 얼마나 기뻐했을까. 당신이 있었다면, 아마 당신이 결혼식 사회를 보지 않았을까. 친구보다 더 떨려하는 얼굴로, 더 기뻐하는 얼굴로 단상에 서 우렁차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겠지.
나는 무서웠다. 많이 무서웠다. 죄송스러웠고 무서워서 당신의 가족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인사도 드릴 수 없었다. 그렇게 피해오던 지난 오 년이었다. 너무 잘 됐다고 축하드린다고, 그렇게 당신의 친형 결혼식에 찾아가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겁을 먹은 나는 결국 가지 못했다. 날이 가까워 올 수록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보면서 나의 친오빠는 완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함께 가보자 밀어붙이기엔 움츠러든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봬도 되지 않을까. 이제는 봬야 하지 않을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담담하게 안부를 여쭙고 나도 잘 지내고 있다고 웃는 얼굴로 마주 봬야지. 마음을 꿀꺽 여러 번 삼켰다. 정말이지 크게 삼켰다.
당신이 좋아하던 그 친구의 결혼식.
식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신의 부모님들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어디 계신 걸까 친오빠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오빠는 많이 안심했다. 드디어 내가 당신의 부모님들을 뵙고 인사도 드릴 수 있게 되었구나. 이제 괜찮아졌는가 보다.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마냥 따뜻하고 기대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더 미안하고 슬퍼졌다. 당신의 부모님을 마주 뵙고 나는 또다시, 아주 보잘것없게 무너졌으니까. 제대로 서는 법을 까먹은 어린애처럼 마음을 빙글거렸으니까. 다시 휘청이다 결국 주저앉아 버렸으니까.
당신과 닮은 두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닮은 두 사람이.
당신을 마주보는 것만 같았다.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무척이나 슬펐다. 당신의 가족이 내 앞에 있지만, 당신이지 않으니까.
'멋쟁이가 다 됐네. 잘 지냈어?' 작지만 야무진 따뜻한 손이 나의 손을 꽈악 마주 잡고 물어오셨다. 마지막으로 뵀던 때보다 다섯 살을 더 먹었으니 이제 스물두 살 풋내 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겠죠. 여기저기 사회의 때가 묻어 성숙해진 나를 보는 마음은 어떠셨을까.
'만나는 사람은 있고? 에이 없기는.' 거짓으로라도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해서 안심을 시켜드릴걸. 내심 걱정하셨을 거란 생각이 나중에야 스쳤다. 눈물이 터져 나오려 해서 고개만 가로로 저으며 작게 웃어드리기만 했다. 입을 열면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았다. 짧게 나눈 그 인사의 순간에, 당신도 함께 도란하게 둘러앉은 거실의 풍경이 몇 번을 지나갔는지 모른다. 겨울엔 두 분이 함께 하실 목도리를 선물해 드리고, 가족여행이라며 여름휴가를 함께 가고, 새벽 기도에 나온 나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봐 주시고, 지나가다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생전 사본 적 없으시다는 빨간색의 여름 샌들을 수줍게 선물로 주시고, 나를 '아가'라 불러주시던 그 따뜻함까지 모두. 많은 장면들이 두텁게 마음을 치며 지나갔다.
나는 무너졌다. 당신에게, 내게 어떤 분들이었는지, 얼마나 감사한 인연이었는지. 숨을 쉬기 어려웠다. 수납된 카테고리의 아픔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식은 시작되었지만 자리에 앉지 못하고 화장실로 도망쳐 입을 틀어막고 엉엉 울었다. 망가졌다. 또다시.
이것은 핑계일까. 절대적인 방어일까.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비겁한 술수일까.
너는 나를 사랑해도 좋다. 하지만 내게 같은 질량의 사랑을 강요하지 마라.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랑이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니까. '좋아해'라는 고백엔 기꺼이 같은 답을 할 수 있지만, '사랑해'란 고백엔 거짓을 꾸며내지 못하고 입을 가로로 닫는다. 눈을 들여다볼 뿐이다. 그게 나의 진심이다.
당신을 원망하는 일에는 지쳐 이제는 나를 꾸짖는다. 순서를 바꿔가며 이렇게 할퀴다 보면 언젠가는 그만하라며 휘두르는 손을 꽉 잡고 품에 끌어안아 주지 않을까 하는 환각의 밤을 보내면서. 유월은 무척 괴로웠다. 간혹 꿈에서 당신을 만난 날이면, 또렷하게 상영된 그 고운 얼굴이 너무 감사해 나의 간절함을 칭찬하곤 했다. 그 나약한 이미지들이 현실에서 '닮은'이라는 주제로 내 눈앞에 인화되었을 때, 나는 상실된 나의 현실이 낱낱이 느껴졌다. 닮은 사람만 만날 수 있는 거다. 당신은 이곳에 없으니까. 고통을 재조명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또 괴롭다.
올해는 인사도 못했다. 꽃이 가득한 날에 찾아가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언제나 혼자 하는 약속인데도 그것 하나 지키지 못했다. 내일은 당신에게 다녀올까. 높이 있는 그 얼굴을 눈을 찡그려 선명히 마주 보고 나면 주저앉은 나는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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