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매뉴얼

재이와 시옷 2021. 8. 4. 15:42

 

매일 하나씩, 두 달 동안 60개의 질문을 받고 그에 답했다.

질문들은 온전히 내게 향했고 나의 대답 역시 온전히 나로부터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맥락이 비슷하게 묶이는 질문들이 여러개 있었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과 고민의 시간도 비슷하게 묶이곤 했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을 정의하자니 스스로 좀 우스워졌다. 내가 매번 걸려 넘어지는 질문들은 내게 '가장'을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가장' 싫어하는 건 또 뭔지.

두어개를 꼽아보라, 다섯개를 꼽아보라가 아니라 '가장'으로 하나의 대답을 원했다. 나는 매번 멈칫했다. 

 

스물셋부터 나의 삶은 뭉뚱그려졌다. 내가 그렇게 정의내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다. 그 외는 모두 흐릿하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싫은 것도 없다. 모두 감정의 영역이다. 좋아하기 위해선 감정의 힘이 필요하다. 싫어하기 위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힘이 필요하다. 아주 작게라도. 그런 것들이 우습고 귀찮을 뿐이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기 위해 나의 감정을 한입씩 톡톡 잘게 끊어 실재화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두 지난하게 느껴진다. 

 

내가 결정해 시작한 일이니 끝은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 질문들을 맞닥뜨렸을 때 최대한 하나를 꼽아보기 위해 몇 번 애를 써보기도 했는데, 나중엔 그냥 질문을 무시했다. 머리를 싸매서 밖으로 끄집어 낸 대답이 온전한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랬다. 그것들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나를 인터뷰한 그 시간과 글자들을 한 데 모아 작은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마지막 질문을 마치고 책의 제목을 정해야 했다. 이것 역시 '가장' 제목다운 것을 골라야 했기에 자칫 망설일 수도 있었지만 바로 튀어나온 답은 덤덤했다.

 

 

'매뉴얼'.

 

 

'나 사용설명서' 같은.

집에 가면 책이 도착해 있을 거다.

그럼 나는 오늘 밤 나를 읽어보겠지.

 

 

 

'ordinary; sce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기는 상관없으니 깊이로 안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0) 2021.08.16
위로 받으시겠습니까  (0) 2021.08.09
엄마  (0) 2020.12.20
마음들의 포자  (0) 2020.12.19
얕은 말들과 마음들  (0) 202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