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바람이 많이 불던 이틀이 있었다. 때는 2월의 끄트머리였고 그 사이로 오가던 몇 개의 낱말과 문장들이 카운팅 버튼을 작동시켰다. 내가 참고 견디느라 존재조차 까먹고 있던 그것은 작동이 시작되자 입력된 매뉴얼이라도 있었던 듯 차근차근 실행됐다. 오후의 카페에서 다이어리에 수기로 우선 정리를 하고 밤 러닝을 나가기 전 퇴직서 메일을 발송했다. 수신확인을 하기 전까지 상대의 시간을 가늠하는 게 스스로 괴로울 것 같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리기를 택한 것인데 그 공백은 대체되지 않고 다음날 회신 때까지 편두통처럼 나를 괴롭혔다.
참고, 견디고, 골몰했던 시간들이 어찌 보면 허무할 만큼 단순하게 매조지어졌다. 만 3년을 거의 채워 일한 직장을 그만두었다. 3월 20일. 마지막 근무였다.
01. 나의 베짱이 시대 시작됐다.
02.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탕 주는 날 태어난 나의 연인. 애인의 생일 선물을 저 딴에는 일찌감치 준비했는데 모든 것들이 어그러져 정작 생일 당일엔 애인 손에 아무것도 들려줄 수가 없었다. 내게 티 내지 않으려 애인이 노력하는 게 보였으나 조금 속상해하고 조금 서운해하는 그 감정들이 무던하게 꾸민 얼굴에 비쳤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 아차 했고 뒤늦게 속상했다. 큰마음을 먹고 두툼이와 백화점을 갔다. 큰 결정을 이뤄내서 운이 연달아 붙어준 것인지, 그날 에르메스 매장에 남성 반지갑이 딱 한 점이 있었고 최대로 잡은 예산에 가격이 똑 떨어지기까지 하여 그대로 결제를 갈겼다. 완전 카리스마 있어. 31일이었고 명동에서 그대로 역삼으로 가 일하는 중인 애인 바깥으로 잠시 불러내어 오렌지 쇼핑백 손에 쥐어주고 늦었지만 생일 축하한다고 다시금 전했다. 생일 축하해 콩이야. 크으 나 진짜 멋있었다. 카드값은 미래의 찬숙이가 어떻게든 할 것이다. 지금의 찬숙이는 알 바 아니다 이거예요.
03. 사모님 돈가스를 먹었고 양대창에 일품진로를 또 먹었고 가로수길 한잔의 추억에서 오랜만에 치킨과 떡볶이를 먹었다. 이태원 베이커스 테이블에 3년 만인가 방문해서 묘한 맛의 수프와 돌덩이 같던 샌드위치도 먹었고 꾸준히 테일러 커피에서 커피와 파이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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