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 precipice,

그 낮에 '나'를 묻던 당신이

재이와 시옷 2012. 4. 6. 17:53

스무살 무렵이었다.
두 살 터울의 친오빠는 내가 열 여덟 살이던 때부터 스무살이 되어 지방 대학 기숙사로 내려갔다. 오누이와 단 둘이 비벼가며 살았던 삶의 공간이 어느 순간 반절의 부피로 여유를 남기자, 짐짓 당황했다. 그 나잇대 여고생답게 스스로 씹는 고독을 나름 즐겁게 맛보고 있었다 생각했지만 현실이 내게 그것을 던져주고 나니, 진짜가 되어 살아났다. 나는 당황했고 여러 날을 울며 지냈다.
끄집어 내 말할 수 없는 황량함을 고스란히 안고, 매일밤 아크릴물감 같은 천장을 째려보다 잠이 들곤 했다.

 

 


아르바이트와 대학생활을 함께 충당해나가던 시절.
스무살의 패기답게 학업보다는 통장계좌에 찍힐 '0' 하나를 더 위해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시험기간에조차 스케쥴을 빼지 못해 이틀은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오전 시험을 치른 후에,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 가 책상에 엎드려 쪽잠 2시간을 잔 후 오후 시험을 보러 가곤 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다시 아르바이트를 갔다.


세 번의 시험기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문득 내려다 본 나는 말 그대로, 너절너절했다.
연장 마감까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 와 새벽까지 눈알에 힘을 주며 써내렸던 식품영양레포트에는 D부터 A까지 일관성없는 점수들의 향연으로 북적거렸고, 새내기들의 낛은 엠티와 각종 총회들, 동아리 활동 등으로 맺어지는 선후배간의 자잘한 정과 술냄새 귀엽게 풍기는 것이라 했는데 내게 남은 것은 그저 너절너절해진 채, 풀 죽어 나를 치켜올려보던 '나'뿐이었다. 그랬었다.

일이 바빴던 아빠는 두 달에 한 번 간격으로 나 사는 인천에 오셨다. 언제나 뜬금없던 방문이셨던지라 학교에 있다가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가도 집이라는 아빠의 전화에 화들짝 하면서도 가슴이 기분좋게 몹시 뛰어 집으로 가는 길을 성급하게 서두르곤 했었다.

그 날도 그랬다.
어디냐며, 당신은 집에 와 있다고 밥 먹으러 가게 자주가던 기사식당으로 오라며 으레 당신 전하실 말만 하시고 전화는 끊어졌다. 마침 수업이 끝나고 웬일로 아르바이트도 없던 나라서 곧장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아빠와 함께 먹을 메뉴를 혼자 떠올리며 바닥에 돌가지들을 툭툭 차내면서 그렇게 아빠 계신 곳으로 가고 있었다.
"찬숙아!"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크게 나를 부르던 아빠의 목소리. 들어가 계시지 왜 나와 계시냐며, 구슬리며 차고 오던 돌가지를 뻥 차내고 아홉걸음 내딛어 아빠 앞으로 갔다. 뜬금없고 예고없이 어쩌면 그때의 내게 무례하게 아빠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이상했다. 밥은 먹었냐고 물어오던 무뚝뚝한 아빠면 몰라도, 내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근심어린 아빠는 내게 어색했다. 낯설었고, 이상했고, 무서웠다. 두개골을 샥하고 절반으로 갈라내고 지나간 것처럼 그 물음이 그렇게 서슬파랬다. 그때는 그랬다. 누구도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주길 바랐었다. 그게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허나 부모 눈에는 보였는가 보다. 어느 때인지 알 수 없게, 그 시점에서는 아득한 어느 날부터 너절너절해진 딸이 아빠 눈에는 보였는가 보다.

"왜 그렇게 고개를 땅에 처박고 걸어. 걸어오는 거 계속 보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무슨 일 있어?"
아니이이. 말 꼬리를 잔뜩 엉킨 이어폰의 그것처럼 늘려내며 대답을 하곤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눈물이 우르르 하고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 말이 가장 필요했던 것 같다.
'무슨 일 있어?' 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나'를 물어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매순간 바랐었다. 나를 걱정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게 무슨 일이 있는 지, 왜 고개를 땅에 처박고 걷고 있는 지, 어깨가 왜 그 모양으로 처져있는 지, 이 따위 것들을 물어주길 바랐다. '힘들지?' 라는 물음보다, 초라한 나를 꾹꾹 한 걸음씩 디뎌간다고 하더라도 '나'를 물어봐 주길 바랐었다.



 






조리개를 열고 셔터스피를 낮춘 채 쪼그려 앉아 가만히 숨을 고른다. 후읍-하고 작게 들이마신 숨은 수초동안 다시 뱉어져 나올 줄 모른다. 나를 쓰다듬어주는 위안의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차들을 핥는다. 모두가 바쁘다. 그리고 빠르다. 시간은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갖는데 어찌 저들과 내가 몸을 뉘이는 안락의 터는 그 색부터 다른 것일까. 
띄엄띄엄 구분 지어진 차선을 게슴츠레하게 바라보다, 어쩌면 차선이 모두 직선이 아닌 데에는 말할 수 없는 궁극의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쓸모없는 상상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