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순간이 있다.
저멀리 그보다 아득하게 오래전의 어떤 날이, 그날의 어떤 장면이 불현듯 한장의 사진처럼 번뜩 떠오르는 때. 그런 순간이 있다.
마냥 어린 나이만은 아니라는 자각이 건방지지 않을 만큼이 되고 나니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달까. '좋아하는 게 뭔데?' 라는 물음이 갑작스레 비집고 들어왔을 때 순번을 정해 쪼로록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아차하며 알게 되는 거다.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 하면서.
오늘은 달리는 차의 뒷자리에 앉아 오도카니 창밖을 바라보며 알게 되었다. 나는 한 곳을 오래 또 오래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마주앉은 상대와 대화를 할 때 종종 그들의 당황한 모습을 보곤 했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함께있는 동안, 대화하는 동안 나는 상대를 오래오래 응시한다. 대개 눈을 바로 맞추는 걸 좋아하고 말하는 품새를 요목조목 탐하며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눈을 맞췄다가, 눈썹을 보았다가, 위아래로 움찔거리는 귓바퀴를 보았다가, 가르마의 방향을 보았다가, 콧잔등의 귀여운 번들거림을 본다거나, 부산스럽게 풀어진 셔츠 가장 윗 단추를 본다거나 하는 등의. 그럴 때면 꼭 무언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집의 불을 켜놓고 나오지는 않았는지, 오늘 입은 속옷 색깔이 검정이었는지, 안경을 챙겨 나왔는지 등의 쓰잘데 없는 것들만 떠오를 때도 있고, 오늘처럼 사진 한 장 같은 과거 어떤 날이 떠오를 때가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무척 정적이던 그 장면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얀 눈과 대조되던 피묻은 아빠의 팔이 떠올랐다. 검은 양복과 검은 구두.
어스름한 저녁을 지나 때는 분명 밤이었다. 사위는 고요했고 오르막 골목을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귀가가 늦어지던 아빠였다. 나는 집 앞 평상에 앉아 아마 아빠를 기다렸던 것 같다.
비가 뿌리고 지나간 자리에 먼지가 쌓이고 노란 장판으로 합판을 덧댄 평상은 거무스름한 때가 엉겨있었다. 한쪽에 구겨져 있던 비슷한 꼴의 걸레를 집어 들고 엉덩이 두짝 붙일 만큼만 슥삭 자리를 닦았다. 그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늦는 아빠를 기다렸다. 저기 달려가긴 민망하고 걸어가긴 먼 것 같은 거리에 아빠가 보였다. 걸음에 살짝 비틀거림이 있었다. 술을 조금 자셨는가보다. 그 모습을 보고 쯧 혀를 차지 않았던 걸 보면 술을 마시느라 늦어진 아빠가 '그 날'은 이해가 되었었는가 보다.
검은 양복과 검은 구두. 하얀 눈과 대조되던 피묻은 아빠의 팔. 그리고 흰 와이셔츠. 아빠 손에 들린 축축한 검은 봉다리. 그 아래로 뚝뚝 떨어져 흐르던 핏방울. 어둔 밤 피의 빨강을 구분할 수 없어었을텐데 두께를 가진 양 질척이는 봉다리의 모양새를 보며 분명 생각했던 것 같다. '아빠 손에서 피가 나는구나' 울음으로 덮인 아빠의 얼굴. 어둔 밤 눈물 자국을 구분할 수 없었겠지만 분명히 알았따. 울고있던 아빠의 얼굴.
달려가지도, 걸어가지도, 다가서지도, 모른체 하지도 않았다.
엉덩이가 붙어버린 양 자리에 꼬옥 앉아 느릿느릿 비틀비틀 집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눈으로 좇았다. 놀랐는지 엄마의 작은 비명이 들린다. 무슨 일이냐 물었을 거다. 꼴이 왜 이런 거냐고. 어디서 싸웠느냐고. 아빠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엉엉 우는 소리만 들렸다. 아이같은 울음, 끅끅 목 울대를 치며 터지는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간혹 들렸다. 그게 다였다. 검은 봉다리 안엔 소주가 들어있겠지. 아빠는 또 술을 자시려는가보다. 라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 평상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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