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이는 없고 말하는 이만 남은 흑백 무대에서,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고, 남겨야 한다고, 스스로 부여한 사명감에 머리를 감싸고 앓아도 보지만 진정 기록하고 싶은 것이 어떤 목차를 이뤄야 하는지 계속 머뭇거리게 된다. 일기 한쪽을 못난 글씨로 채워가며 알아가는 건, 내게 글감이 되는 것이 턱없이 적다는 사실이다. 내가 쓰는 것들이란 당신이거나, 당신과의 이야기 거나, 지긋지긋한 옛사랑이거나, 자기 환멸과 비슷한 스스로를 향한 애증이거나 하는 이제는 아무렇게나 발에 차이는 흔해 빠진 것들 뿐이다. 그래서 글이 이어지기 쉽지 않고 계속해서 써가는 것은 어렵다.
더는 당신을 쓰지 못하는 날이 오는 걸 수도 있겠다.
타이핑을 하고 나니 놀랍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순간이다. 당신을, 더, 쓰지, 못하는 날, 이라니.
흉터라고 당신은 내게 흉터라고 여기기로 했는데. 시간으로 희미해지기는 해도 결코 감쪽같이 사라지지는 않는 흉터. 내게 당신은. 그래서 오래도록 빈 화면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멀뚱히 보다 보면 이 화면 너머 어디에 내가 시선을 두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지금도 그 순간이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연습게임 없이 덜컥 한판 승부의 무대에 오르게 될까 무섭다. 당신을 한순간 뺏겨 버릴까 봐. 정신이상자스러운 말이지, 오래전에 잃었는데 또다시 뺏길 것을 걱정하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