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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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삼월, 이라 부르지 않았었나

달에 두 번. 날씨를 문자로 옮겨놓은 그것이 참 신기하고 예뻐 달력에 적힌 절기를 꼼꼼히 소리내 읽어보곤 했다.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꼭 맞아 떨어질 수가 없다며 절기가 일러주는대로 옷을 꾸려입고 때론 후회도 하고 꽃내음을 깊게 들이쉬며 경탄도 하고 그랬다. 인생의 한 시기를 보내지 않았나. 우리의 시기를 '춘삼월'이라 부르곤 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곧 춘삼월이 도래하지 않겠나, 그때가 되면 우리 역시 꽃피겠지, 우리 또한 활짝 피어나겠지 따뜻하겠지 아름답겠지 우리의 사랑이 더욱 무르익겠지. 시절이었다. 아름다운, 말로 다 할 수 없이, 야릇한 봄내음으로 가득했던, 그런 시절. 마음을 쓰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요즘이다. 배워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

악의없음으로

악의 없음으로. 악의 없음으로 상처 줄 수 있음을. 의도하지 않은 말들, 마음들, 문장들, 그를 포함한 모든 권유들 또는 위로들, 그것들 모두가. 위로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힘의 크기를 조절하지 못하고 뭉툭하게 나의 어깨로 떨어지던 당신의 팔을. 내릴 수도, 뿌리칠 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대로 받아냈다. 툭툭 아프게 떨어지던 그 무게가 당신이 묵혀 놓은 마음의 무게 인가 하며 그렇게 가만히 자리에 엎드려 누워 있었다.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제멋대로 이미 터져버린 눈물이, 당신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 더 미쳐 솟구칠 것 같았기에. 걱정이 돼서 그랬던 거겠지. 어떤 악의 없이, 당신이 쭈뼛거리며 꺼낸 어색한 서두처럼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말이었겠지. 이렇게 느껴졌는데 이것이 진..

14_어떻게 해도 안되는 게 있어

망설임이 무안했다. 실소가 한 번 지나간 자리에 가로로 닫은 입이 남았다.  '가장 추운 일요일.' 몇 달 전 찾아온 시시한 겨울 중 오늘, 가장 추운 하루가 될 것이라 했다. 패딩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아는 가족과 친구들은 밖에 나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고 나는 겁이 조금 났지만 오기를 부렸다.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의 이틀 전, 옷을 미리 꾸려보았다. 시시한 겨울이라고 비아냥대기엔 다소 민망한 다섯 겹의 차림이었다. 거울 속 나는 마치 뭉툭한 지우개 같았다. 검은색 점보 지우개. 의식적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날엔 검은색을 걸친다. 감춰지고 싶고 숨고 싶고 사라지고 싶어서.  찬 바람이 볼을 에는 것 같았다. 머플러로 차마 다 가려지지 못하고 드러난 피부에 바람이 화..

seek; let 2016.01.24

마음을, 생각을, 잘

냉장고 안 귀퉁에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며칠 된 식빵처럼, 눈으로 마음으로는 흘깃거리면서 버려 놓았던 2015 두계절이 지나간 나의 블로그. 애정을 아주 접지도 못하여 마음은 계속 쓰고 있었으면서 기록도, 짓는 것도 모두 흥미를 잃어 될대로 돼라는 생각으로 한 켠에 치워놓았다. 의욕이 없으니 될대로 돼라는 막무가내의 주문이 통할리 없었다. 무엇이 되지 않았고 그저 여기 있었다. 제자리. 나의 마음을, 저 아래 구겨 접어놓았던 먹지 같은 그것들을 꺼내놓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백지. 이제는 찾아갈 수 없는 철원의 아버지 가게처럼 나의 도피처가 되어주는 곳. 이곳. 마음을, 생각을, 잘. 다이어리에 가장 먼저 새기는 문장이 있다. 문장은 매해 다르다. 나름의 슬로건이랄까, 만성 게으름을 앓고 있는 나라서 어떤..

고통의 역사

최근 읽은 책 한 권이 있다. 책을 사들이는 일에는 끊임없이 부지런하여 지금도 첫 장 한 번 펴보지 못한 여러 권의 책들이 책장에서 먼지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지만, 서점의 온라인몰 장바구니는 비워질 줄 모른다. 책을 읽는 것도(책을 고르고 담고 내게 오기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들까지 모두 포함하여) 너무 좋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너무 좋다. 술자리 한 번을 취소하면 못해도 책 세 권은 살 수 있는데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게 참 나는 멋쩍다. 아무튼, 지난달 임여사가 준 문화상품권을 써 구매한 책이 한 권 있다. . 오랫동안 마음이 아픈 병을 앓은 작가와 그 작가의 정신과 담당의가 함께 쓰는 이야기. 아픔과 병에 관한 이야기. 7년을 서로 만났다고 했다. 만남이라는 단어는 언뜻 수줍어 보이지..

구월, 제주의 해가 피부에 아직 남아있다

9월, 제주도에 다녀왔다. 다녀왔었다. 21일 아침 일곱시 비행기를 타고 가서는 만 사흘을 떠돌다가 23일 밤 아홉시 반 비행기를 타고 서울집으로 돌아왔다. 사흘을 꼬박 채웠던 여행이었다.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 도망치고 싶을 때면 제주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려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언제든 단출하게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베짱이의 아주 큰 장점이었으니까. 무척 많은 억새가 보고 싶어 9월과 10월의 어디쯤 떠나는 날을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정작 용눈이오름에 가지 않아 많은 억새는 보지도 못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티켓 사이트를 얼쩡거리던 어떤 날, 새벽 네시쯤이었을까. 미리 계획이라도 세워둔 양 표를 예매했다. 다가온 날에 맞춰 새벽 지하철 첫차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임여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