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ordinary; scene 44

오래 살라고

/ 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무엇일까. / 위기의식이 든 것은 아니지만 평범하고 무탈한 일상이 괜스레 머쓱한 마음에 출근길에 충동적으로 맥북을 챙겨 나왔다. 오늘의 일을 해내며 저녁이 끝나가는 시점엔 집으로 갈 것인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것인지 잠시간 고민도 했지만 지난주엔 이 고민 뒤에 미련스러운 태세로 무거운 가방을 다시 이고 지고 집으로 갔었기에 오늘은 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약수역에 갈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버스 안에선 무엇을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 예전에 보니 병맥주도 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마실지 그래도 집에 사놓은 빅웨이브 있는데 바깥에서 9천 원 주고 마시기엔 좀 아깝지 않을까 나는 카페인에 약하니까 디카페인으로 마셔야겠다 살찌니까 주전부리는 먹지 않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

ordinary; scene 2023.04.19

섣달 그믐날

맥북을 여니 화면 오른편에 작은 알림이 떴다. '내일이 섣달 그믐날이라고.' 12월 31일 캘린더에 어떤 일정을 기록해둔 게 없는데, 그냥 내일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지 엉뚱한 기색이었다. '섣달'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끝 달 '그믐날'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 '섣달 그믐날'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생김이 무척 정직하고 곧은 단어들이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단조로운데 생김이 예쁘다. 곱다. 오늘은 일하는 금요일이고, 내일은 일하는 토요일이다. 모레인 일요일에는 쉰다. 일을 마친 두 사람은 토요일 밤에 만나 월요일 아침까지 빠듯한 사흘을 보내고 다시 토요일 밤을 기약하며 각자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아침 출근길에 선다. 오늘은 30일이고 내일은 31일 섣달 그믐날이고 모레인 일요일은 신정이다. 1월..

ordinary; scene 2022.12.30

짝사랑의 종말

마땅한 글감이 없다고 을씨년스럽게 비워두곤 하는 이 공간에 쓸 말이 생겼다고,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오게 된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일까.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낯을 들여다보면 괜찮다고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거다. 되려 불편한 감각이 돋아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짝사랑에 대해서 쓸 거니까. 나의 외사랑을 쓸 거니까. 부모에게 덜 사랑받는 자식이 쓰는 이야기니까. 처음 하는 짝사랑이다. 한 두 달 전일까 인터넷에서 그런 글귀를 봤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외사랑이 존재한다고.'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바로 떠오르는 장면이란, 자식이 닫고 들어 간 방문을 쓸쓸하게 쳐다보는 부모의 처진 어깨와 뒷모습일 수 있겠지만 내가 읽고 느낀 장면은 두 주인공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부모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ordinary; scene 2022.12.17

꼬박 한 달

쓰고 보니 '꼬박'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귀엽다. 꼬박. 순간 말이 너무 귀여워 다른 날처럼 사전에 검색해 보니 유의어로 '고스란히'가 걸린다. 얘는 또 이거대로 귀엽고. 꼬박과 고스란히 라니. 시월을 맺으며 적었던 일련의 일상들이 벌써 한 달이 되었다. 그로부터 꼬박 한 달이 지난 것이다. 흘러 다시 더해진 그 한 달의 이야기를 십일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또 적어 기록하려 한다. 내일이면 다시 한 달이 더해 흐르겠지. 그럼 해의 숫자가 바뀌는 날이 또다시 올 테고. 11월은 뭐랄까. 무뎠고 행복했다. 오랜만인 것은 맞지만 처음은 절대 아니었던, 오래 손과 머리에 익은 일을 다시 시작한 11월 1일의 첫 하루. 일하는 사람과 방식이 같거나 흡사해 몇 년 전 카레 점장이던 전생이 자주 떠올랐다. 유독 이..

ordinary; scene 2022.11.30

시월을 맺으며

다시 내게 다가오는 하루가 될 뿐인데, 날짜와 숫자에 의미를 조금은 두고서 시월을 맺는 글을 몇 자 적고자 한다. 앨범에 든 사진들을 보며 지난 한 달을 가늠하고 몇 장의 사진들로 월간 일기를 기록할까 했는데, 보정되지 않은 날것들이라 내가 생각하는 시월의 내 모습인 사진 한 장으로 단정 지으려 한다. / 2일의 일요일. 공휴일이 두 번 있었다. 개천절과 한글날. 학생 때도 일개미 때도 카레점장 때도 커피매니저일 때도 빨간날을 빨간날로써 소비해 본 경험이 적은 나는 3년 남짓 고정 데이트 요일이 된 우리의 일요일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까만 고심한다. 짧게는 이틀, 월차에는 사흘을 연인과 함께 보내는데 공휴일을 앞두고 강남권 숙소 비용이 뜨악스럽게 뛰어 토요일 밤이 아닌 일요일 한낮의 강남에서 몇..

ordinary; scene 2022.10.31

달리고 걷다 보면

오늘은 10월 8일이다. 코로나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던 갖가지 축제들이 서울 곳곳에서 날 좋은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승부욕이라도 보여주듯 앞다투어 열리고 있다. 오늘은 여의도에서 불꽃축제가 있다. 열흘 전부터 인스타그램에선 숨겨진 불꽃 축제 감상 명소들이 피드에 랜덤으로 뜨고(피드에 이미 떠버리는데 어떻게 숨겨진 명소일 수 있을까) 뉴스에선 혼잡할 여의도 도로 사정과 대중교통 이용의 어려움을 내보낸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을 맨 눈으로 보기 위해 여의도 일대로 낮부터 몰려들고 있다. 평소보다 일찌감치 일어나 긴 샤워와 샐러드로 식사까지 마친 나도 여의도가 아닌 어딘가로의 외출을 아주 잠시간 고민도 했지만, 오늘 서울의 핫플이라고 한 번이라도 호명된 적 있던 모든 곳들은 사람들로 부글부글 끓을 ..

ordinary; scene 202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