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seek; let 26

불행의 동력

감춰진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을 해. 무엇이 쓰고 싶었지,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지, 숨겨놓은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또 한 번 생각을 해. 왜 감춰두었지, 왜 숨겨두었지, 기억이 되지 못한 꿈을 꾸어서인지, 닫힌 방 문 너머로도 선명한 빗소리 때문인지,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억지로 잠을 깨우는 이도 없었고 충분하리만치 자내고 스스로 눈을 떴는데도 불쾌한 감각이 머리 안팎으로 응집해있는 느낌이었어. 어떤 날은 그것들을 업무처럼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다가도 또 어떤 날은 오늘처럼 속수무책으로 K.O패를 당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기분이라고 패배를 선언해. 내게서 만들어진 기분을 내가 다룰 수 없다는 게 나를 멍청한 늪에 빠뜨려. 타인이 다녀간 불행을 짐작하면서 나의 불행에 등..

seek; let 2022.07.13

다시 흘러 고여버린

다른 걸 써야 하지 책임도 의무도 아닌 어떤 강제로. 당신을 적다가도 금세 지우고 또 올려 두었다가도 문질러내고. 그런 낮과 저녁들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텅 빈 화면이야.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쓰지 못한 채 내게로 다시 흘러 고여버린 짙푸른 마음들.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 절망은 마치 그늘 한 점 없이 트인 도로 같아. 절망의 온도를 온몸으로 때려 맞고 눈물을 뺏기고 말라죽는 그런 죽음의 도로 한가운데 말이야. 숨을 곳이 겨우 나의 두 손바닥뿐이라는 비린내 나는 진실이 오늘도 지겹지. 막상 숨겨준 적도 없으면서. 내가 나를 안아준 적이 있었나. 등 떠밀어 종용했지. 아파도 된다 그 명분 뒤에 비겁하게 숨어있으라고. 단 한 뼘도 자라지 못한 것 같아. 단 반 폭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아. 너무 예뻤을 거라..

seek; let 2022.05.05

11월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길어지는 저녁을 의식하게 되면 밤이 도통 저물지 않음을 느끼게 되면 찬바람에 드러난 살갗이 조금 따갑다 느껴지다 보면 내 생일 즈음이 되면 당신 생각이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날이 많아지면 겨울에 왔다는 걸 깨달아 내가 또다시 그 계절에 서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아 찬 공기에는 늘 당신이 있고 나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처럼 허상으로 당신의 냄새를 좇는 그런 계절에 왔다고 깨달아 분명 이 겨울에 또 한 번 도착한 것뿐인데 나는 이 시기가 되면 내가 이 계절에 버려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 당신이 나를 이 계절에 버리고 갔고 다시 주우러 오지 않아서 나는 마음 끝에 동상을 주렁주렁 달고 속절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것 같아 사실은 내가 당신을 이 계절에 버린 걸 텐데 당신이 나를 온종일 ..

seek; let 2021.11.02

이토록

당신이 이토록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나 그게 너무 무서운데 속상하고 마음 아픈데 이러다 어느 날에 사진 없이는 당신 눈코입도 그려내지 못할까 봐 그럼 어떡해 그렇게 되면 어떡해 누군가는 잊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한번도 단 한시도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거든 당신을 잊으려는 생각도 시도도 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되는 날이 혹여 올까봐 내가 원치 않던 그날이 언젠가는 꼭 내게 들르게 될까 봐 나는 그게 너무 겁이 나 두려워 무서워 당신을 잃을까봐 또다시 잃을까 봐 무서워 그때는 영원일 거잖아 영원히 잃는 거잖아

seek; let 2021.09.09

into your arms

잠기면 좋겠어. 아래로 한참 가라 앉아서 무언가로 덮여 잠겼으면 좋겠어. 비가 와. 늦은 오후에 떨어지기 시작해서 차츰 길을 적시고 있어. 줄기가 굵지 않았는데도 내리는 모양새에 퍽 군기가 들었던지 사위가 금세 젖었어. 퇴근길까지도 비가 내릴 것 같아. 지금 이 글을 쓰는데, 마치 당신에게 읽어주듯이 소리내 문장들을 읽고 있는 나야. 듣고 있는게 아닐텐데. 듣고 있었다면 이렇게 답이 없을 수도 없잖아. 투정이 부리고 싶은건지 하소연이 하고 싶은건지 화를 내고 싶은건지 모두 다 아니라면 그냥 그냥 믿고싶은 것 같아. 아니 믿기 싫은 것 같아. 어김없다 정말. 일 월이면 어김없이 절망에 잠기는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 당신의 부모를 가엽다고 생각해. 지난 연인밖에 되지 못하는 내 주제로도 이런 고통을 앓는데 ..

seek; let 2021.01.21

내 사랑에 당신이 밑지는 게 없을텐데

겨울이야. 오늘은 제법 겨울의 복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이지 싶어. 기온이 영하 13도로 떨어졌고, 이틀 뒤엔 해를 표기하는 숫자가 달라지니까. 2020년 12월 30일. 오늘은 수요일이고. 반듯하게 각을 잡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낱말들을 옮겨적는 일이 수 년 만이라. 기념할만큼 대수로운 것도 아니고 그에 따라 설레고 수줍은 감도 전혀 없는데 그동안 왜 그리 번듯한 글이라도 적어야 할 것처럼 머뭇거렸던지 모르겠네. 이곳에 찾아오는 이가 누구라고, 누가 나의 마음들을, 낱말들을 들여다 본다고, 기다린다고. 속으로는 으스대기라도 했던지 [글쓰기] 버튼을 찾아 누르는 그 폼새가 영 별 거 없었어. 그냥 별 일 아닌건데. 오가는 사람 드문 거리를 몇 분 지켜보다가 부러 챙겨온 일기를 꺼내서 아무 말이나 ..

seek; let 2020.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