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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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_지난 일기

지난 일기를 본다. 2008년의 이야기다. 0이 두 개 들어 간 낯선 숫자를 보며 지금으로부터 뺄셈을 한다. 아, 꼬박 6년 전이구나 벌써 그렇게. 그래 맞아. 나의 스무 살에, 빛이 나던 스물두 살 당신을 만났었으니. 아침부터 즐거울 수 있던 날이었다. 아르바이트 오픈을 도맡았던 날. 늦게 떠진 눈에 나를 질책하며 부랴부랴 택시에 올랐는데 그날 첫 운행을 나온 서른 살 초보 기사 아저씨와의 작은 해프닝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택시비의 절반값도 내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되려 좋은 하루 보내라며 인사를 건네는 기사 아저씨의 살가움에 짐짓 기뻐했던 것 같다. 오픈은 처음이었던 나였는데, 지문 묻은 유리문 너머 부스스 찔러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가이드라인 삼아 대걸레질을 해나가는 게 퍽 즐거웠다. 점장님..

seek; let 2013.06.15

07_부탁

슬픔과 고통에 잠겨있는 나의 부모를 곁에서 방관할 수밖에 없을 때의 그 무력감을 천천히 그러나 깊게 인정해야 할 때의 그 심정을. 경험해본 적 없던 무력감이었다. 나의 부모를 잃었던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런 간절한 무력감이다. 회사 자리에 앉아 익숙한 순서로 업무를 보던 때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하는 때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냐며 오후엔 전화를 하지 않는 분인데 그렇게 전화가 왔다. 불안한 기색 하나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어므니' 하며 말을 떼었을 뿐이었는데 수화기 건너편 엉엉하는 슬픔의 단조가 들려왔다. 나의 어머니가, 당신의 어머니의 부고를 내게 말하고 있었다. 팀장님께 말을 전하고 급히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선 내 귀에 박히는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 엄마 엄마 하..

seek; let 2013.05.01

06_환생(還生)

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갈망을 이제는 이해한다. 지금은 하루 적어도 두 잔 씩 챙겨마시는 커피를, 그때는 왜 그렇게 커피숍에 가는 것을 쑥스러워했었던 지. 어깨에 카메라 걸치고 쫄래쫄래 나란한 나무숲 사이 걷는 것을 애정 하면서, 그때는 어쩜 그리 도심의 한적한 갓길만을 걸어댔던 지. 요리를 3년 내내 배워놓고, 묵직한 밥상 한 번 차려주지 않았던 지. 그 와중 대령하다시피 내 앞에 놓이던 수많은 마음들은 어찌 그리 태연하고 당연하게 받아냈던 지. 대학 과건물 앞 벤치에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도시락을 감싸고 있던 수줍음을 기억한다. 내가 잘 먹기를, 공강이 여의치 않아 끼니를 거를까 늘 챙겨주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자주 해주지 못해 되려 미안하다며 내 손에 그것을 들려주던 그 진하고 단 마음을. 도..

seek; let 2013.04.21

05_새벽에 묻혀버린 새벽

'새벽에 너 울잖아.' 무슨 소리냐는 듯 눈동자로 물었다. "내가?" '그래 술 잔뜩 마시고 우리 집 가면 너 새벽에 자면서 울어. 되게 흐느끼면서.' 알은체도 할 수 없었던 새벽의 나. 새벽의 나로부터 피어나던 절망의 아지랑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덕분으로 무사한 일상일 수 있었다고 안심했던 지난 새벽의 무수한 '나'들은, 종내엔 절망의 연기를 잔뜩 피워내며 나의 울타리들을 숨 가쁘게 했었구나. 현실의 나는, 모두 내 잘못은 아닐 거라고 면죄부를 찾아내기에 조급했는데, 무의식의 나는 상처의 홍수를 방어하지 못하고 눈물로 희석하기에 바빴었나 보다. "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촌스러웠던 차림을 한 열여덟 살의 나와, 병원 환자복의 티를 감추기 위해 애쓰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걸음이 불편했던 만..

seek; let 2013.03.06

04_비

조금, 처량히 내리는 비를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이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을 견뎌내지 못하던 스물두 살의 내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풍경엔, 셋이 있었다. 도로를 향해 테이블이 놓였던 자리는 통유리로 되어있던 대학교 근처 커피숍이었다. 아르바이트밖에 모르던 때였다. 학점은 누더기가 되어 헤벌레 입을 벌린 채 멍청한 웃음을 띄고 있는데, 오픈조며 마감조며 가라지 않고 부모의 경제적 지원 없이 학자금 대출을 갚기에 바빴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라는 청춘의 명찰보다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근로자의 신분이 더 잘 어울리는 꼴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공강 시간. 군대에 갔던 동기가 휴가를 나와 학교를 찾았다. 대학교 친구는 단 두 명이다. 소현이와 곰...

seek; let 2013.02.27

03_한 공간 세 개의 이유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드라마 '내 딸 서영이' 에서 이보영이 한 대사. 드라마 여주인공이 헤어진 지난 연인에게 바닥 저 밑까지 들켜버렸다는 걸 알아버리곤 제발 곁에 있지 말고 모든 걸 끝내 달라며 뱉은 대사. 스윽하며 빠르게 귓속으로 박혀 들렸다. 문장이 촉각이 되어. 찢어진 속옷만 입고 서 있는 기분이야. 처참함과 수치스러움이 동시에 엄습해 흐르는 눈물조차 냉랭해져 버리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그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지는 않았을까. 왜 모든 절망의 기억은 겨울에 밀집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낮은 공기의 온도 때문에 그만큼 더 선명한 걸까. 두 무릎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 작아진 몸의 태를 기억한다. 옆에 앉아 있었지만 손을 뻗어 당신의 굽은 허리를 펴줄 수도 없었고,..

seek; let 2013.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