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pice o-f- Communications./

타인의 불행 앞에 나의 다행을 뒤적거리는 비겁함을 갖지 않게 하소서.

전체 글 280

거짓말에 대해

어떤 소녀스러운 감성으로 꾸며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진심으로 내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했다-'라는 과거형의 문장을 적을 수밖에 없어 참 씁쓸하지만 다 내려지지 않은 결론으로 보건대 그리 적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나의 말하기 형태'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한다. 목소리의 고저(高低)와 말의 빠르기, 발음의 정확함 이런 것들을 모두 포함하여 '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미 지나쳐 간 장면에서 '아,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것보다 더 좋은 비유가 있었는데. 그랬다면 설명도 더 쉬웠을 거고 내 생각을 전하기에 더 알맞았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는 순간들이 꼭 있다. 안타깝게도 번번이. 이런 생각들을 지나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은 "정말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

필요한 시간에 대해서

/ 이성 또는 동성에게까지 별 수 없이 마음이 죄다 흔들리고 마는 두 가지의 감각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겠지만, 스스로는 이 감각에 무척 예민하다고 믿고 있는. 바로 냄새와 목소리. 한 사람이 가진 특유의 냄새(그것이 불유쾌 어떠한 것이든)는 그것보다 더 강한 향수라는 공산품으로 덮을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다르다. 우스꽝스럽게 잠깐의 변조는 가능하겠지만 평생을 거짓소리를 내며 살 수는 없으니까. 좋은 목소리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이 듣는 순간 흐너지고 만다. 목소리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일상에서 귀를 스쳐가는 '좋은' 목소리들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귓바퀴를 깔대기 삼아 집중해 듣곤 한다. 뜬금없이 목소리 얘기를 하는 것은 좋아하는 기자님이 게스트로 있는 팟캐스트를 ..

안녕, 할머니

아빠는 오랫동안 지방과 섬들을 오가며 장사를 하시던 분이었고 엄마는 나와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에서 궂은일을 하다 초등생이 되었을 무렵엔 가구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양육이 온전할 수 없던 때, 나와 오빠는 할머니 손에 컸다. '손에 컸다'는 말이 적확할 만큼 먹고 자고 입고 생활하는 태반을 할머니가 책임져 주었다. 나는 머리가 굵어지며 아무도 모르게 사춘기를 보내자는 심산으로 마음이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이 집에서 나는 언제나 외톨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로부터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몇 년 전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할머니는 다 알고 있으셨단다. 늦은 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엄마에게 할머니가 말하길 '가시내가 요즘 사춘긴지 뭐시긴지 여간 까탈스럽게 구..

비교적 짧은 이야기들

/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페이지의 여백이 적나라한 다이어리를 보며 그간의 기억들을 곰곰 짚어본다. 작은 네모상자에 들어가는 하루들이니 긴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비교적 짧은 이야기. 아니면 대놓고 짧은 이야기. / 다시 불안정한 수면이 시작되었다. 생활이 규칙적이지 못한 반베짱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지만, 반베짱이 된 지가 언제인데 최근 두 달 사이의 수면은 너무도 불안정하다. 자고 깨고 그 자체 행위에만 의의를 두는 듯이 가늠할 수 없는 시간대를 오간다. 저녁에 잠이 들기도 하고, 아침에 잠이 들기도 하고, 저녁에 깨어나기도 하고, 완연한 새벽에 깨어나기도 한다. 더듬더듬 머리맡에 있을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지금이 몇 시인고 찌르듯 들어오는 불빛을 게슴츠레 바라보면 새벽 두..

어쩌면 아주 오래된 결핍이었다고

어쩌면 아주 오래된 결핍이었다고. 나의 이성조차 바로 보지 못했던 어쩌면 진짜 나의 이야기. 술에 취해서인지 뱉어지는 말들은 여과 없었다. 언제라도 터뜨릴 모양이었던지 비엔나소시지의 꼬리처럼 상처로 점철된 고백들이 입에서 쏟아졌다. 이미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 마음이 예전에 주저앉아버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고. 너무 힘이 든다고." 나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 같아서. 그랬던 것만 같아서. 온갖 시간들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온전한 동정이 가슴 아팠지만, 비껴갈 수 없는 오랜 세월의 증거였기에 묵묵히 나를 찢어내고 벌건 상처를 그제서야 내보였다. 새까맣게 탄 가슴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아문 적 없던 어제 난 것만..